brunch

제목없음, 만들어가는 중(프롤로그)

프롤로그: 과민 ’ ‘

by 김규민

12월 22일 일요일

3/6


아파트의 문을 열자 찬바람이 나의 얼굴을 덮쳤다. 벌써부터 얼어붙는 손을 무릅쓰고 나는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꽃았다. 집에서 꽂고 나올걸. 나는 후회했다. 음악을 재생시키자 시끄러운 록음악이 나왔다. 알파벳 순으로 정렬된 전체 음악 셔플이었기에 내가 원하는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집에서 이어폰을 꽂고 원하는 가수의 재생목록을(나는 티나 터너의 노래가 듣고 싶었다.) 누르고 나올걸. 다시 나는 후회했다. 따뜻한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는 번거로움을 감수할 정도로 내 음악을 향한 욕구가 크지는 않았기에, 나는 날씨와 어울리지도 않는 록 음악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다.


—오늘은 ’그 남자‘ 가 보이지 않네.


4년 전부터 나는 독서실을 제외한 모든 장소를 가는 데 있어 항상 지나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그 길을 지나가는 10번 중 4번 정도는 항상 만나는 남자가 있다. 뻣뻣해 보이는 잔디 같은 백발에 턱에는 입체적인 점 (이걸 뭐라고 부르더라?) 이 하나 올라와 있는 그는 수상할 정도로 나와 자주 마주치곤 했다. 항상, 그 길에서. 처음에는 ’그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으나, 자주 만나면 만날수록 그는 뭐랄까- 노안이 심한 중년 남자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단정하기엔 또 모르는 일이었기에, 나는 그를 ’그 남자‘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길에서 가끔가다 마주치는 게 전부인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인연도, 공유하는 역사도 없다. 나는 왜, 언제부터 이 남자를 기억하게 된 걸까? 10번 중 4번은 그를 만난다고 했지만, 그만큼, 아니면 더 자주 마주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사람도 아닌 그를 ’ 알게 ‘ 되었다. 알게 되었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가령 그는 날씨가 좋은 날에는 잠옷과 일상복 중간의 애매한 무언가를 입고 나오곤 했다. 또 적어도 나와 마주칠 때의 그는 항상 혼자였다.


그는 어떨까. 그도 나를 알까? 그도 나를 항상 이어폰을 한쪽에만 꽂고, 우울한 날씨에는 옷의 지퍼를 반쯤 내리고 다니는 학생으로 알고 있을까? 2초도 되지 않는 반복되는 만남에 학습된 나는 결국 2년 전부터 이 길을 지나갈 때면 ’그 남자‘ 를 만나지 않더라도 ‘그 남자‘ 가 생각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남자는 언제 또 볼 수 있으려나.


어느새 내 귀에서는 록 음악은 끝나고 리스트의 음악이 들려오고 있었다. 리스트 사랑의 꿈 3번: ’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 제목은 나로 하여금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리스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예술가들은 제목을 매우 신중하게 만든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사랑할 수 있다의 기준이 뭘까? 그냥 내가 할 수 있으면 되는 걸까? 아니면 현실과의 타협도 필요한 걸까? 만약 내가 짝사랑하는 여성에게 이미 연인이 있다면, 그건 사랑할 수 있는 상황일까? 나의 마지막 사랑은 초등학교 5학년이지만(슬프게도 나의 친구들은 초등학교의 사랑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결국 나는 연애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망상이라거나 그런 건 물론 아니고, 그저 사랑이라는 감정을 순수히 좋아한다. ‘누군가와’ 사랑한다는 것만큼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게 있을까. 있다. 짝사랑.(개인적으로 어감이 별로라고 생각한다) 짝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데 충분하고도 남는다. …. 우울해지려고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나는 사고의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저 멀리 초록불을 깜빡이는 횡단보도가 보인다. 추운 날씨는 사람을 둔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뛰는 게 귀찮다고 느낀 나는 다음 신호를 기다리기로 하고 걸음을 늦췄다. 나의 조금 앞에는 건널지 말지 망설이는 눈치의 정장을 입은 사내가 보였다. 그는 건너는 쪽일까, 기다리는 쪽일까? 이미 마음을 굳힌 나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의 선택을 지켜보기로 했다. 나의 걸음은 결코 느리지 않다. 그런 나를 20초 전 추월한 그였기에 뭔가 급한 일이 있다고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 그였기에 나는 건넌다는 쪽에 걸었으나, 그 또한 나와 같이 기다리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는지 걸음을 늦추었다.


—그쪽도 추우신가 봐요.


순간 나는 바람에 구르는 낙엽을 벌레로 착각해 발을 헛디디며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했다. 저 멀리 횡단보도에서 달려오던 자전거는 나를 향해 경적을 울리고(벨이 아닌 진짜 경적 소리였다), 자전거 위의 할아버지는 나를 향해 골을 냈다. 이어폰이 어쩌고 저쩌고….


—아닌데. 한쪽만 끼고 있어서 잘 들렸는데….


이어폰을 양쪽에 꽂으면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무섭다. 뒤에서 누군가 덮쳐도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아무도 나를 노리지 않지만. 청각이 차단되면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이어폰을 꽂지 않으면 소음만이 들린다. 소음만을 들으며 걸으면 나의 체력과 정신적 연비는 떨어진다. 그렇기에 나는 한쪽만 끼고 다니기로 스스로와 타협했다. 짝사랑을 논할 뻔하고, 사내의 횡단보도 예측까지 틀린 나였기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런 나에게 갑작스러운 제삼자의 화는 나로 하여금 ‘정말 불행한 인생이야’라는 생각과 함께 비참함을 느끼게 만들 뿐이었다.


—뭘 이런 걸로 비참해지는 걸까


나의 약한 정신력에 다시금 비참함을 느낀다. 이런 멘탈로, 나중에 사회생활은 어떡하지. 어서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렸다. 근거는 없지만 그것만이 당장에 나를 비참한 기분의 쳇바퀴에서 꺼내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것만 같았다.


초록불. 내 예상대로 사내는 성급히 뛰어갔다. 아마 방금 건너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천천히 횡단보도를 걷기로 했다. 나를 대놓고 지켜보는 저 차주들에게 너무 급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일찍 움직이는 성실한 학생으로 봐주길 원했다.


나는 ‘우연이란 존재하는가’ , ‘재능이란 무엇인가’ , ‘사랑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진지해지면 상대 쪽에서 부담을 느낄만한 종류의 화제에 대해 처음부터 생각하기를 좋아하지만, 때때로 오늘처럼 생각만으로 ‘정신적 자해’가 의도치 않게 일어날 때가 있다. 이럴 때마다 나는 무척이나 우울해진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행복한 생각이나 철학적인 생각을 하며 스스로의 사고에 감탄할 때도 있다. 한 번은 나의 생각이 실제로 존재하는 이론임을 알고 늦게 태어난 걸 후회한 적도 있다(물론 일찍 태어난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겠지만). 생각도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생각은 타인의 간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부와의 상호작용 없이 나는 스스로를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고,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다.


정면으로 3명의 여학생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뭐가 저렇게 기쁜 걸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여학생들과 나의 간격은 좁혀지고 있었다. 나는 항상 정면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곤란해하곤 했다. 왼쪽으로 피할지, 오른쪽으로 피할지 몰라서 우물쭈물 눈치만 보다가 서로의 호흡이 맞지 않아 진로에 지장이 생기는 것이다. 항상 대부분은 나의 과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러던데, 하고 나는 심각한 고민을 했다. 진지하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걸까 하고 생각도 했지만, 그것이 진짜건 아니건 이건 스스로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답을 얻어내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달 전부터 나는 정면 1:1 상황이 생기면 그냥 직진하는 선택을 했다. 상대 쪽에서 먼저 나를 피해달라고 무언의 요청을 하는 거다. 효과는 있었다. 스쳐가는 사이기에 그들이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는 나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 3:1 상황은 처음이다. 오른쪽 길은 건물벽으로 막혀있다. 누가 먼저 왼쪽(그들 입장에서 오른쪽)으로 비켜가냐의 눈치싸움이었다. 서로의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나의 존재를 알고는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다. 나는 원래의 작전대로 직진을 선택했다. 이건 큰 오판이었다. 역시나 그들은 나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듯하다. 내 마음속에서 비행기 착륙장치의 기계음이 울렸다. 7미터. 6미터. 5미터…. 5미터 정도 됐을까. 나는 몸을 90도로 틀어 (그 동작은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워 단순한 방향전환이 아닌 안무의 한 동작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직진했다. 그리고 다시 90도. 직진. 다시 90도. ’ㄷ‘ 자 모양으로 경로를 설정한 나는 가까스로 그녀들을 피했다. 그녀들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녀들은 나를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이윽고 나는 알 수 없는 수치심에 휩싸였다.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