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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all of me

상상은 모르핀처럼 작용한다

by 김규민

존 슈미트의 ‘all of me’라는 곡이 있다. 피아노 곡인데, 희망적인 분위기의 곡임에도 이 곡을 들으면 눈물이 나곤 한다. 해피엔딩을 맞이한 주인공이 단골 카페의 문을 열 때. 인사하며 반기는 주인한테 “저 왔어요!” 하고 말함과 동시에 영화가 끝나며 엔딩 크레딧이 나올 때. 그 엔딩 크레딧에서 흘러나올 듯한 곡이다. 곡의 분위기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합하지만, 이 곡에는 위로도 한 스푼 들어있는 것 같다. 위로는 무섭다. 무너지다가도 위로받으면 울게 만드니까. 희망과 위로가 합체하면 웃으며 단순히 슬픈 울음이 아닌, 고마움 같은 긍정적인 요소 한 스푼 섞인 울음이 나온다. 마지막에는 웃는 울음.


10년 전 피아노를 마지막으로 친 나지만, 나는 가끔 ‘all of me’ 만큼은 꼭 배워서, 미래의 연인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녀도 나처럼 울어준다면, 조금 고마울지도 몰라.


작가가 되고 싶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해야 할까?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를 좋아해서 따라 해보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나만의 문체를 갖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뭉클함을 느낀다. 이런 기분을 다른 사람도 느끼면 좋겠다. 가능하면 나의 글로. 에쿠니 가오리는 도쿄 타워를 계기로 알게 된 작가다. 이모의 추천으로 서점에서 구매했지만, 이모가 추천해 주신 도쿄 타워는 동명의 다른 소설이었다. 나는 서점에서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 타워를 집었고 읽고 충격(?) 받았지만, 그 실수 덕분에 에쿠니 가오리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으니 그 운명에 감사한다. 지금은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를 읽고 있다.


닮고 싶은 작가가 에쿠니 가오리라면, 인생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살고 싶다. ‘먼 북소리’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3년간 유럽에서 살며 만들어간 자신의 이야기를 집필한 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유럽에서의 3년 동안 두 권의 장편소설과 단편집 하나, 번역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중 한 권은 하루키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이다. 내가 하루키에게 닮고 싶은 부분은 그의 인생의 아주 작은 한 토막에 불과하지만,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루키가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3년을 보냈다면 나는 조지아에서 글을 쓰며 살고 싶다. 조지아. 성경에서 노아의 방주가 정착한 대지에 해당하는 나라. 인간에게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가 묶였던 산이 있는 나라. 웬만하면 조지아라고 할 때 떠오르는 건 미국의 주나 커피일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물론 조지아도 관광객이야 있지만, 유럽만 하겠는가!) 조용한 나라를 원했다. 나는 이 계획에 진심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진 못하겠다. ‘할 수 있으면 하고 싶다’ 정도의 희망사항에 그치지 않지만, 일단 나는 조지아어를 독학했다. 그 결과 읽고 쓰는 건 가능하게 되었다. 꼭 하루키가 그리스어를 공부하며 3년의 여행을 준비한 것처럼.


성인이 되어도 선생님과 연락하고 싶다. 감사한 분들이 많다. 학원 선생님도 그렇다. 중학교 선생님의 경우 엄청난 확률을 뚫고 3년 연속 같은 담임선생님과 쭉 함 깨였다(선생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의 경우 2학년은 최고의 한 해였다. 담임은 최고로 친한 선생님이었고, 어떤 선생님은 진로와 관련한 조언을 해주셨는가 하면, 어떤 선생님은 내가 철학을 좋아하게 되는데 영향을 주셨다. 그렇게 철학과를 꿈꾸는 사람이 된 나다. 선생이란 직업은 무척 대단한 직업이다( 더 멋진 표현을 쓰고 싶은데). 자신들은 알고 있을까?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 학생의 인생을, 꿈을 바꾸곤 한다. 그래, 꼭 기적 같은 사람들이다. 나에게 선생님은 그런 존재다.


인생이라는 건 정말 모르는 거라는 건 고등학생인 나도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가정을 꾸린다면,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다. 그냥 어린 시절을 함께하며 친구처럼 놀아주는 게 아닌, 자식의 고등학교 시절까지도, 그, 또는 그녀의 고등학교의 추억이 오직 친구들 만으로 채워져 있다면, 그건 왠지 슬플 것 같다. 자녀의 고등학교 추억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아빠가 되고 싶다. 한 명의 아들이자 고등학생 신분으로 존재하는 나다. 어른이 되어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할 때 그 회상에 내 아빠가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나이기에 미래의 자식은 나 같은 (고등학교 시절을 아빠와 어색하게 지내는) 자식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희망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 같은 자녀와 나라면 진지하게, 내가 속상해져서 울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당장에 나는 인생을 20년도 살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런 나도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의 말뜻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게 맞는 걸까? 누군가는 미래 생각은 대학 가서 하라고 한다. 하지만 대학도 미래의 일부고, 내일도 미래의 일부인걸. ‘내일은 이 선생님을 만나네 ‘ ’ 다음에 뭐라고 말하지 ‘ 같은 생각도 하는 걸, 반박한다. 물론 속으로.


미래에 대한 상상은 때론 나를 슬프게도, 기대에 차게도 만든다. 아직 뜯지 않은 상자 같다고 해야 할까? 여러 물건을 시키고 초인종이 울릴 때. 가장 바라던 물건이 먼저 왔을까? 하는, 그런 두근거림. 미래를 상상할 때만큼은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상상은 나에게 모르핀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마음 진통제. 현재의 상황이 아무리 비참해도, 기분 좋은 미래를 상상하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다. 그리고 ‘한 스푼 섞인’ 눈물을 흘리고는 한다.


물론 나도 알고는 있다. 이 꿈들 중 몇몇은 나의 목표가 아닌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정말 이성적으로 보면 위의 모든 것을 이루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도 알지만, 가능성이 0이 아니라고 하면, 나의 가슴은 두근거린다.


지금의 이 고생이 나중에 좋은 결과로 보상받으면, 그땐 얼마나 기쁠까. 당장에, 힘들 때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나는데, 그때 운다면 그건 아마 두 스푼은 섞인 눈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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