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중요한 사실
‘과거의 자신’ 만큼 공감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앞선 모든 불안과 걱정이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그 불안함이 착각이든, 진짜든, 나의 모습은 우울한 사람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나는 수업에 적극적이지 못했고, 선생님과의 그 어떤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주로 내 쪽에서. 나의 자아가 이를 거부하는 듯했다). 나는 수업에서 평범한 학생 1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조용해 있는지도 모를법한 학생 1. 주사위와 나의 하모니는 환상적이었다.
— 선생님, 저 오늘 뭔가 평소랑 다르지 않았나요?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 물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지금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질문이다. 무슨 생각에 나는 저런 질문을 했을까. 나는 선생님에게 ‘오늘의 저는 오해예요, 잊어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런 해명을 위해서는 선생님이 보셨을 때 내가 우울해 보인다는 걸 인지하셔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어야 했다.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한가? 나의 관점에서 촉발된 아주 이기적인 걱정이자 질문이었다.
—그런가요….
이 말을 끝으로 나는 고개를 재빨리 돌렸다. 오른쪽 눈꺼풀이 떨린다. 마지막으로 마그네슘 영양제를 먹은 게 언제더라.
—오늘 기분이 뭐랄까, 너무 다운된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요
선생님의 반응은 기억나지 않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볼까. 머릿속으로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자. 어떤, 나름 친해서 특별히 이름을 알고 있는 학생이 다가와 나에게 말한다. ’ 선생님, 저 오늘 뭔가 평소랑 다르지 않았나요?‘ 별 생각이 없었던 나는 대답한다. ‘글쎄, 특별히 다르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우물쭈물,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인 학생이 다시 입을 연다. ‘오늘 기분이 뭐랄까, 너무 다운돼서요.’ 나의 시뮬레이션에서 출력된 대답은 ‘으응, 딱히?’였다.
그 이후의 나의 의식의 필름은 편집된 듯 끊기게 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반에서 담임선생님의 종례를 듣고 있는 내가 있었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하늘은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회색빛의 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 사이로 힘겹게 숨결을 뱉어내고 있는 태양이 보였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나의 왼쪽 귀에 들려오는 빌리 홀리데이의 음성은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한쪽 귀에 꽂혀있는 무언가를 빼내자마자 나의 세상은 조금이나마 평화를 되찾았다. 세상은 고요해졌고, 어둡기만 한 파동을 뿜어내던 나의 마음도 조금은 고요해졌다. 아직 낮인데도 불구하고 공원에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 오늘은 못하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엄마에게 나의 의사를 말했다. 도저히 오늘은 공부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보는 엄마에게 나는 그냥 사실대로, 너무 우울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엄마와 대화를 나눈다거나, 모자간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그런 걸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나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나지만. 엄마에게 진지하게 감정을 토로한 적 없는 나지만. 정말로 우울하니까, 엄청 슬프니까 나는 엄마에게 우울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꾀병을 부린 적도, 우울하다는 표현도 쓴 적이 없는 나의 이런 모습이 걱정됐는지 엄마는 나의 부탁을 허락해 주셨다.
나는 낮잠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맞을까. 공부를 하고 나면 나에게 보상의 시간을 주고 싶기 마련이다. 늦은 밤에도 읽고 싶은 책이 있고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졸음 때문에 이걸 하지 못한다. 나의 몸과 정신의 싸움에서 지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낮잠은 ‘시간 건너뛰기’ 같은 느낌이 나서 잠에서 일어나 몇 시간이 의미 없이 지나간 시계를 보면 허무해진다. 쉽게 말해 낮잠을 잘바엔 멍을 때리겠어,라는 마인드. 흔히 말하는 ’ 몸을 간다 ‘ 가 나에게 해당되더라도, 스스로에게 보상만큼은 꼭 주고야 말테야,라는 마인드.
잠을 통해 생각하기를 강제중지 시켜버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나 나는 시간 건너뛰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 건너뛰기를 통한 잠깐의 도피보다도 나에게 필요한 건 회복, 치유였다. 내 눈에 마저 읽지 못한 책들이 들어왔다. 저걸 읽으면 분명 기분이 나아질 거야. 나는 쉬운 사람이니까. 자리에 앉아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 에쿠니 가오리의 ‘여행 드롭’ ,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새벽 두 시였다.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꼭 울다가 사탕 하나에 웃는 어린아이 같네.
물론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나는 내가 망가지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더 관대해져야 한다고 느꼈다. 7월쯤부터 였을까. 나는 미래에 위협을 느껴(?) 공부량을 갑작스럽게 늘렸다. 점점 늘어나고 늘어나서. 꼭 공부하는 기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성적이 올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로, 나 스스로 자신할 수 있을 만큼 열심히 살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나보다 조금 달리고 더 높은 결과를 얻어내는 친구가 있을 뿐이었다. 주변인들로부터 열등감을 느낀다, 부끄러워진다, 눈치를 본다, 의 단계로 변화는 일어났다.
나는 평소 의식하지 않았던 행위를 의식하게 되었다. 걷는 보폭이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걸을 때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지? 엘리베이터에서 시선은 어디에 둬야 하는 걸까? 저기 사람이 온다. 어느 방향으로 비껴가야 할까? 따위의. 사람눈치를 봐도 너무 보는 성격이 되었다.
나의 모든 일상이 계산으로 치환됐다. 말 거는 타이밍도 계산, 이런 말을 할 때의 경우의 수, 이런 행동이 나중에 관계에 미칠 영향, 등등….
이런 변화에도 긍정적인 점은 하나 있었다. 게임을 접었다는 점, 억지로라도 공부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게임을 한다면 남들이,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에 게임보다는 책과 가까워졌으며, 하루 정해진 양만큼 공부를 하지 않으면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로 봤을 때에만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일 뿐, 나의 마음은, 그 행동의 동기가 불안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친한 친구나 선생님처럼, 그저 아는 사람 이상의 관계인 사람을 상대할수록 나의 계산은 많아졌다. 주사위 마저 1이 나왔던 오늘은 그 계산까지 느린 날이었다. 복기 끝. 나의 마음은 한층 가벼워진다. 오늘만큼은 아무튼 알아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마음에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나의 기복은 많이 나아졌지만, 이런 사태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나이기에, 확실하게 행복해지려고 노력한다.
색깔을 되찾을 수 있도록. 25년이 행복한 결말을 가질 수 있도록. 소중한 나의 인간관계가 무너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