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덴 형제의 명작 <아들>
프레임 밖에서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떠오는 수식어들이 있다. 사회고발적 시선, 윤리적인 카메라, 핸드헬드 카메라, 시간을 따라가는 선형적 플롯, 미니멀한 음악연출, 기교 없는 영화, 칸 영화제의 제왕 등 그들의 영화를 보았고 조금이라도 안다면 정말 다양한 수식어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생각할 때, 항상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은 부끄러움이다.
나는 사회적으로 건강한 사람인가를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내가 하는 생각과 행동이 비난받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도덕적인지. 나로 하여금 남에게 상처나 피해를 주지는 않았는지. 항상 고민하고 점검한다. 그렇게 나는 타인을 위한다는 겉치레로 보이는 갈등을 내면에서 지속한다. 언뜻 보면 배려로 보이는 이런 생각들의 외피를 한 꺼풀 벗겨보면 이 모든 것은 나를 위해 행하는 생각이다. 또한 타인에게 부끄럼 당하지 않기 위해서 경험에서 생긴 메커니즘들이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나는 스스로를 3자의 시선으로 보려 부단히 노력한다. 그럼에도 이따금 나도 모르게 뱉은 말이나 생각으로 종종 타인에게 상처를 주어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경우가 많았고 앞으로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부끄러움이란 감정은 우리를 한 없이 깊은 굴 속으로 들어가게 하거나 이전보다 진실되게 만들어주는 상흔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부끄러운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아 절대! 다시는 그러지 말자.", "앞으로는 잘하자 하는 생각"을 머리와 마음에 3번씩 새기곤 한다. 물론 시간과 습관이라는 풍화가 상흔을 금세 지워가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부끄러웠던 시간을 잊지 않으려 의식하고 노력한다. 부끄러움을 새기려 노력하는 나에게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시간과 관성을 뛰어넘어 풍화되지 않을 부끄러움을 깊이 각인해내고 마는 경험을 선사한다.
영화 <아들> 속 카메라는 시종일관 1.66: 1이라는 좁디좁은 프레임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치는 올리비에의 뒷모습을 묵묵히 따라간다. 작 중 올리비에는 가구제작훈련센터에서 선생 목수로 일하고 있으며, 소년원에서 나온 소년들에게 목수 일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숨겨진 하나의 비밀이 있었으니, 그는 5년 전 어떤 소년에게 아들을 잃었었고 현재는 아내와 이혼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5년 전 아들을 죽였던 프랜시스라는 소년이 가구제작훈련센터에 위탁된 것을 알게 된 후, 카메라와 프레임은 시종일관 흔들리고 그의 불온한 숨소리로 가득 메워진다. 그리고 다르덴 형제는 좁은 화면과 흔들리는 카메라라는 틀 안에서 아들을 망실한 올리비에의 뒷모습과 숨소리 만을 묵묵히 담아낸다.
영화 <아들>은 최소한의 연출만을 하고 있다. 지루하다고도 여겨질 수 있는 이 화법은 우리에게 사유의 시간을 준다. 종일 좁은 화면에 성나보이는 아저씨의 뒷모습만이 나오니까. 음악도 일절 나오지 않고, 그 흔한 플래시백 장면조차 나오지 않는다. 영화를 반 이상 보고 나서야 주인공 올리비에가 처한 환경(이혼, 아들을 잃은 사실 등)을 겨우 확인할 수 있고, 우리는 오직 선형적 플롯 속에서 종일 그의 뒷모습과 숨소리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연출은 우리가 직접 그의 감정과 생각을 유추하도록 설계된 연출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올리비에의 뒷모습과 숨소리뿐이기에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출소한 프랜시스를 바라보는 그의 심상을 우리가 직접 상상하도록 만들어졌다. 때문에 올리비에의 표정이나 대사로 직접 전달받는 감정이 아니라, 관객이 보는 프랜시스에 대한 심상을 프레임 밖에서 직접 상상하도록 만들었다. 때문에 다르덴 형제의 영화 <아들>은 영화관에서 사유하도록 하는 윤리학 실험실과도 같은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하며, 우리가 가진 윤리적 잣대의 형태를 바라보게 하는 연출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말미, 추악한 형태를 하고 있는 나의 윤리적 잣대를 확인한 나는 몰아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영화를 본 당시의 나를 스스로를 반추했을 때, 감상 중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프랜시스에 대한 일방적인 증오심, 강한 분노, 원망 그리고 아주 약간의 연민이었다. 올리비에의 아들을 죽이고 5년 후, 가구를 만들며 살 거라며 온 그가 너무나 미웠고 뻔뻔해 보였다. 때문에 나는 내심 올리비에가 그에게 복수하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영화 내내 확인할 수 있던 것은 다소 심심한 반응들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올리비에는 내가 아니었다. 나라면 쏟아냈을 일방적인 분노와 폭력을 그는 선택하지 않았다. 프레임 안에서 등과 격랑 하는 숨소리만을 들으며, 나는 스스로 살의, 슬픔, 고통과 같은 복수의 감정만을 만들어냈었다. 때문에 나에게 이 영화는 스릴러이자, 가면이 없는 나를 보는 무서운 거울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장면은 영화 마지막 전환되는 카메라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시퀀스의 내용은 프랜시스가 죽인 아이가 선생 올리비에의 아들이었던 사실을 알게 된 이후의 이야기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그들은 싸움이 아니라 함께 나무를 싣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며 카메라는 두 인물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낸다. 프랜시스의 등을 보며 프레임 밖에서 분노만을 쏟아냈던 내가 프레임 속에서 마주한 진실은 화해였다. 그리고 둘의 서먹한 표정을 함께 담아내며 영화가 마무리되었을 때 나는 머리에 큰 충격과 함께 부끄러움을 오롯이 마주해야만 했다.
영화를 보며 나는 올리비에가 프랜시스에게 사적제재를 가했으면 하는 마음을 지속적으로 투영시켰지만, 감독들이 보여준 것은 계속되는 삶과 화해였다. 영화가 끝난 후, 분노를 쏟아냈던 프레임이 이내 어두워졌고 화면은 나의 당혹스러운 얼굴을 비췄다. 이윽고 나는 부끄러움이 밀려왔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르덴 형제가 매번 진행하는 윤리 실험극에서 가장 무서운 나를 발견했고, 음악도 없고, 화려한 화술도 없이 오직 카메라의 시선만으로 많은 것들을 성공적으로 함의해낸 그들의 위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항상 나의 '부끄러운 내면'을 투영시키는 거울이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며 이전보다 너그럽고 조금 더 나은 시선으로 세상과 나를 바라보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시금 새기며..
★★★★★(10)
프레임 밖에서 마주한 부끄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