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려고 벌써부터 설레니?
1월에 갔던 캄보디아가 너무 좋아서, 잊을 수가 없어서 7월에 재방문하기로 한국에 오자마자 마음먹었었다. 씨엠립에만 11일을 머물렀던 겨울과 달리 이번에는 씨엠립에서 열흘간을 머문 뒤,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으로 넘어가 당일 여행을 한다. 프놈펜에서 약 두 시간 거리인, 아름다운 코롱섬을 품고 있는 시아누크빌로 넘어가 3박 4일을 지낸다. 시아누크빌에서 치앙마이로 넘어가 8일을 머물다 14일 새벽에 한국에 도착할 예정이다. 주로 한 도시에 머무는 것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꽤 많은 곳을 경유하는 여행이 되겠다. 총 20박 22일, 여름방학의 대부분을 여행지에서 보내게 된다.
나는 왜 홀로 떠도는 방랑자가 되었는가. 그것도 마흔 넷이라는 늦은 나이에 말이다. 주변에서 한창 배낭여행 다니던 이십 대 시절에는 한국 지박령으로 있었는데. 무엇이 나를 자꾸 떠나게 만드는 걸까.
여행은 현재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다. 여행지에서의 모든 것들은 '내가 이것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내가 이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내가 이 음식들을 다시 먹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같은 여행지에 두 번 가는 경우는 드물기에, 삶을 마지막인 것처럼 바라보게 된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열리고 너그러워진다. 처음 본 사람의 술값을 내주기도 하고, 처음 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기도 한다. 처음 본 사람의 합석을 허용해 주고, 사소한 실수는 눈감아 준다.
흔하고 평범한 거리의 풍경도 마음에 새기며 오래오래 바라본다, 다시는 보지 못할 것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만날 때는 시간이 멈추고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듯 황홀경에 빠지기도 한다. 사실 한국에도 있는 일몰이고 일출인데 왜 앙코르와트의 일출은 더 특별했을까. 여행 중에는 나를 비롯한 세상 모든 것들이 특별해진다.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과 팬케이크를 사 먹는 내가, 시장에서 흥정하는 내가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여행 중에는 어쩌면 세상과 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여행지에서 만난 이방인은 특별한 인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저 평범한 동남아의 가이드일 뿐인데, 수많은 가이드 중 한 명일 뿐인데, 나는 그들을 위해 준비할 한국 기념품을 고민하고 있다. 그저 가이드 한 번 해준 것뿐인데, 나는 다시 그들을 만날 생각에 들떠 있다. 씨엠립에서의 마지막 밤에 함께 마셨던 맥주의 감동을 재연할 날을 고대하며, 단톡방을 만들어 간간이 안부를 전하고 있다.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캄보디아인을 두 명이나 알고 있다는 게 내게는 감동이다. 나는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들에게 나는 그저 돈 쓸 준비되어 있고 적당히 술 마시며 놀아줄 외국인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괜찮다. 여행이니까. 여행은 그렇게나 관대하다. 여행이라는 명목으로 웬만한 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이번에는 도미토리에 한 번 묵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원어민과의 영어 과외도 시작할 예정이니, 외국인과 영어로 스몰톡하기에 도전해 볼까 한다. 약 넉 달 동안 영어로 스몰톡할 실력이 만들어 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왕 도미토리에 묵는 거, 남녀혼성 도미토리에 묵어볼까 하는 과감한 계획도 품고 있다. 더 나이 먹기 전에 한 번쯤은. 멋진 백인 남성이 말을 걸어 주고 맥주 한 잔 같이 하는 사이로 발전하면 좋겠지만 현실이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한번 꿈꾸어 본다.
이번 여행에서는 조금 대담해지고 싶다. 씨엠립은 안전한 곳인걸 알았으니, 든든한 가이드 두 명도 동행할 거니, 조금은 대담하고 릴랙스 하게 지내보든 것은 어떨까. 1월의 씨엠립에서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누가 내 가방 낚아챌까 두 손으로 가방 꼭 쥐고, 가이드한테도 운전면허등과 가이드 면허증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누가 말이라도 걸면 눈이 동그래져 바로 경계태세로 돌입하고, 일정이 끝나면 대부분의 시간을 숙소에서 지냈다. 이번에는, 짧은 바지와 치마도 입어보고 싶고 조금은 섹시한 포즈의 사진도 찍어보고 싶다. 이를 위해 여행 가기 전에 위고비를 미리 맞아 사람들의 안구를 보호해 줄 생각이다. 숙소에만 있지 말고 거리를 나와 일찍부터 낮술을 마시며 밤까지 술집에 앉아도 있어 보고, 낮선이에게 미소도 보내보고 스몰톡도 해보고 그러다 함께 맥주도 마시는 그런 대담한 상상을 해본다. 맘에 드는 남자가 있다면 키스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여행지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가 대담할지, 한없이 소심할지도 예측할 수 없다.
여행지에서는 나를 잊고 싶다. 내가 알던 나를 잊고 싶다. 그래서 나를 모르는 이방인이 좋다. 이방인에게 라면 나를 한껏 열어 보일 수 있을 것 같은 모순. 모두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과 모두가 나를 모르는 세계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 사이에 내가 있다.
모두를 몰랐으면 좋겠어. 모두가 몰랐으면 좋겠어. 내가 이대로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는 그런 세계로 가고 싶어. 그런데 나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 사랑하고 싶은데 너무 사랑하기는 싫어서, 사랑받고 싶은데 너무 사랑받기는 싫어서 그럴 때면 여행을 가지. 여행을 가면 모두가 나를 모르는 세계가 펼쳐지지. 나도 모두를 모른다. 그래서 좋다.
떠나려면 아직 넉 달이나 남았는데, 어쩌자고 벌써부터 설레는 것인가.
오늘,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설렘 예약이다. 이제 설렐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