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던 나를 살게 한 온기

메마른 마음 위에 조용히 스며든, 단비

by 진다락

그리 오래 산 삶은 아니지만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밝았고 동시에 가장 어두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내 안에 깃든 어둠에서 도망치기 위해 더욱 밝게 지냈다. 지금의 내가 평온이 흐트러지는 일에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하는 것은 어쩌면, 그 시절의 밝음이 부끄럽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급히 걸쳐 입은 것이었기 때문에. 내 자신도 나의 진짜 모습을 착각할 정도로 어둠과 밝음의 경계에 살던 나에게 너는, 조심스럽게 진짜 나를 꺼내어 아무 말 없이 안아준 사람이었다.



나에겐 친구들이 많았지만 너의 짧고 통통한 손가락과 자꾸 따라 해보고 싶었던 너의 글씨체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 작은 손이 말보다 먼저 내 무너짐을 감싸주던 순간들이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손으로 너만큼 예쁜 꽃들을 만지며 수많은 이들의 특별한 순간을 조용히 빛내주는 일을 하는 네가 참 자랑스럽다. 가장 조용히,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너의 그 손길이 가장 너답다고 생각한다.



학교가 끝나면 좋아하던 편의점 빵을 하나씩 들고 우리만의 작은 피난처였던 놀이터로 향했던 날들을 기억한다. 낡은 그네에 나란히 앉아 저녁 햇살이 땅에 길게 드리워질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네를 밀었었다.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발끝으로 느껴지던 땅의 거친 질감과 머리칼 사이로 불어오던 부드러운 바람, 우리가 즐겨 듣던 노랫소리가 조용히 귓가를 스치면 어느새 우리는 울음을 멈추고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너랑 함께 있는 그 시간들은 나를 숨 쉬게 해주는 고요한 휴식 같았다.



그에 반해 나는 참 이기적인 아이였던 것 같다. 어리기도 했지만 너에게는 더 버거운 친구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침부터 눈물을 흘리며 등교하던 날에도, 하루 종일 참았던 눈물을 밤새 통화하며 배려 없이 쏟아내던 날에도 내 슬픔을 묵묵히 받아주던 너였다. 넌 언제나 마치 네 일인 양 자연스럽게 나를 품어 안아주었다. 특별한 한 순간을 꼽을 수 없을 만큼 너는 그 시절 내내 조용히 내 곁에 있어 주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 우리는 서로 다른 대학교로 진학했고, 각자의 삶을 바쁘게 살아내며 지금까지 왔다. 내가 먼 곳으로 이사를 오고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부터는 우리가 주고받는 안부도 점점 드물어졌고, 그만큼 서로의 소식이 멀어진 듯 느껴졌다. 우리가 서로에게 소홀해진 시간들에 대해 너는 미안해하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네가 마음속에 함께 있다. 너는 먼 길을 떠나도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오래된 나무처럼 변치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얼마 전, 책을 읽다가 '상처'라는 단어를 마주했다. 너와 나 우리 사이에는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 그런데 이상하게 그 순간 문득 네 얼굴이 떠올랐다. 어릴 적, 나는 나에게 헌신적이었던 너의 진심을 때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내가 힘들다고, 마음 아프다고 너의 시간을, 너의 마음을, 너의 손을 내 마음대로 움켜쥐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게 혹시 너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누군가의 아픔을 온전히 받아내는 일은 자신의 온기를 덜어줘야만 하는 일이란 걸 알게 되면서 그 시절 너의 따뜻함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네가 내게 건넨 마음들을 내가 다 지켜내지 못했을지라도 그 시절의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그 마음까지 이렇게 조용히 품고 살아갈 것이다.



너는 내 인생에 그런 존재다. 내가 나인 채로 살아도 괜찮다고 느끼게 한 사람. 내 가장 지치고 힘들었던 시절, 내 안의 어둠 속에서 나를 살게 했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가게 만드는 사람. 내 곁에 너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 그걸로 나는 이 삶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됐다.



언젠가 네 마음이 무너지는 날엔 나를 찾아와 주길 바란다. 네가 나에게 그랬듯 너의 곁에 내가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있겠다. 그 시간이 너를 살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두 손에 쥘 수 있는 마지막 온기가 되겠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웃을 수 있기를.



너는 여전히 나의 단비다. 잊히지 않고 스며 있는, 언제 떠올려도 마음이 젖는 고맙고 따뜻한 사람. 나도 언젠가 네 마음에 단비처럼 닿을 수 있기를 조심스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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