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놓고 온 것들

나는 늘 그곳이 그립다.

by 진다락

제주를 떠나오던 날, 나는 짐을 챙기면서도 놓고 가는 것들을 헤아렸다. 오랜 친구들과의 웃음, 동백이 피던 겨울 골목, 드넓게 펼쳐진 바닷소리와 햇살을 머금은 귤밭의 따스함 같은 것들.


그럼에도 나는 떠나야 했다. 내가 나로 살아보기 위해, 여태껏 나를 만들어준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야만 했다. 내 마음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던 그들은 제주의 습한 바람처럼 물기를 머금은 채 웃으며 나를 배웅해 주었다.



제주를 떠나고 나는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탔다. 속박되지 않은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고 그 낯선 추위는 반가우면서도 오래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였을까. 문득문득 떠오른, 제주에 놓고 온 것들이 내 마음을 더욱 시리게 했다.



제주 바다에는 검고 구멍이 송송 뚫린 현무암이 많다. 거센 바람이 불 때마다 바닷물은 그 돌들 위를 넘나들며 숨바꼭질을 하고, 깅이와 보말은 물살 아래에서 묵묵히 제 삶을 이어간다. 거칠게 몰아치다가도 어느새 조용해지고, 무심한 듯 다정하게 다가와 발끝을 적시는 파란 숨과 모래를 휘젓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다독이는 물빛 결은 눈이 부시다. 제주의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오랜 세월, 제주 사람들의 삶을 조용히 품어주던 터전. 말없이 누군가의 하루를 견뎌주던 바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바다 같은 사람이 있었다.



겉으론 잔잔해 보였지만 물속 깊은 곳에서 누구보다 많이 아팠던 사람. 늘 곁에 있어 소중함을 미처 몰랐던 사람. 한때는 바다의 거센 파도처럼 나를 아프게 했지만 내가 작은 생명의 바다가 되고서야 비로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 그래서 더욱 사무치게 날 아프게 하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과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 있었다. 늘 앞서가며 모든 것을 흔들고 지나갔고, 때론 집 안 가득 먼지를 일으키며 숨이 턱 막히게 만들었다. 세찬 소리와 강한 기운이 어쩐지 든든해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 바람을 종종 두려워했다. 바람은 멈추는 법이 없었고 나는 그 바람에 맞서 걸으면서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작은 아이였다.



제주를 떠나오고 나는 자주 되뇌었다. 내가 아팠던 날들, 슬펐던 날들, 떠나오지 못해 분노했던 날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그때 불었던 바람 때문이라고 여겼다. 아주 작은 흔들림조차도 어릴 적 내게 깃든 바람 때문이었다고, 나는 탓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알게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바닷결 아래에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무는 깊은 온기가 있었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기류가 우리를 멀리 밀어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바람 덕분에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 누군가는 남아 있었고, 누군가는 떠났지만 그 모두가 우리를 이루는 결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나는 가끔 제주에 놓고 온 것들을 다시 헤아려본다. 철없음을 무기 삼아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그 시절의 친구를 꼭 닮은 아이, 어느 골목에 조용히 문을 연 친구의 식물가게, 예전엔 없던 동네 맛집과 그 앞에 줄을 서는 낯선 사람들, 그리고 한때 나의 힘듦과 상처를 말없이 어루만져주던 사람의 하루가 담긴 식탁.



그리움은 때때로 내가 자란 곳이 지금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내게 익숙했던 길과 정취는 점점 다른 빛으로 물들어가지만, 그 길 역시 점점 변한 나를 익숙하게 반겨준다. 그리움은 그 반가움 속에서 다시 고요히 자라난다. 무심히 걷던 골목에 스며든 내 어린 날의 기척, 어디선가 풍겨오는 풀내음에 문득 울컥해지는 마음, 그 모든 감각이 지금의 나를 품는다. 그래서 그리움은 아픈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모든 날들과 나를 이어주는 안부 같다. 힘들 때 문득 찾아와 언제든 돌아와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따뜻한 위로 같은 안부.



제주는 나에게 그런 곳이다. 내가 놓고 온 것들이 조용히 나를 기다려주는 곳.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마음이, 바람처럼 머물러 있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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