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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외출했다 2.

아빠와 뜨개질

by 멍냥이

평소에 나의 엄마는 재주가 많으면 고생한다고 나에게 뭘 가르쳐 주시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엄마가 집을 비우는 날이면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소소한 것들을 가르쳐 주고는 하셨다.


그날도 나를 불러 앞에 앉으며 엄마의 뜨개질 바구니를 가지고 오셨다.


“자 이리 와봐, 요런 거 배워 두면 좋아”

“엄마가 하지 말랬는데?”


나도 평소에 엄마가 뜨개질하시는 것을 보면 하고 싶어서 가르쳐 달라고 조르기도 했었다.


“괜찮아 엄마도 없는데 뭐, 아빠가 가르쳐 줄게”

“아빠도 뜨개질할 줄 알아?”

“아빠가 못하는 게 어딨어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보고 따라해 봐”


처음에 대바늘에 코 잡는 방법부터 설명해 주셨다.

생각보다 잘 따라 하는 나를 향해

“아이쿠 이렇게 잘하는데 왜 안 했어”

“엄마가 하지 말랬는데.... “

”아니야 할 수 있는데 안 쓰는 건 괜찮은데 못해서 못 쓰는 건 속상한 일이지, 배울 수 있으면 다 배워, 특히 이런 것들은 배워두면 좋아”


난 그렇게 엄마가 외출하신 날이면 뜨개질을 배웠고 마침내 혼자서 창작을 해내는 수준까지 갈 수 있었다.


실과 시간 아마도 지금의 기술가정과 같은 교과목일 것 같다. 작은 소품 만드는 시간이 있어서 목도리를 뜨고 작은 손지갑을 뜨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하는 것이라 하니 엄마는 따로 말리거나 하시진 않으셨고, 난 단연 으뜸의 작품을 제출하고 아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또 중학교 때 가정 시간에는 뜨개질 시간이 있었는데 나의 뜨개실력이 일취월장하여 옷 한 벌을 뚝딱 만들어 낼 정도의 실력이 되어 과제로 5세용 베스트를 만들어 제출해서 만점을 받았다.

선생님께서 너무 예쁘다며 이거 나 줘도 되냐 하시길래 드리고 싶다고 했더니 너무 좋아하셨다.


난 이렇게 아버지의 장난스러운 가르침의 시작으로 인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내가 가장 요긴하게 뜨개질 실력을 사용했던 것은 경제적 난관에 부딪쳤을 때였다.


사업하던 도중에 경영난으로 신용 불량자가 되었고 출산 직후라 육아문제까지 겹쳐서 도저히 방법이 없을 때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기초 생활비용을 보장해 주는 그런 제도도 없을 때 여서 취직을 하면 월급이 차압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육아와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취업이 아닌 작은 수공업시스템을 만들었다.

모자를 디자인한 뒤, 동네 가정 주부들을 모집해서 대량으로 만들어 남대문에 납품하는 일을 했었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작은 뜨개방을 열어 사람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치며 옷을 주문받아 판매하며 경제적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때 난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알고 안 쓰는 건 괜찮지만 몰라서 못하는 건 슬픈 일이라 했던 말씀


나에게 현실이 될 뻔했다.

지금도 뜨개질을 하면 아버지의 얼굴이 사무치게 떠 오른다. 너무나 청춘일 때 가버린 나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작았던 딸은 어느새 이렇게 성장해 아버지 보다도 훨씬 나이 먹은 중년이 되었어요. 아버지의 빈자리가 느껴질 틈도 없이 너무 전쟁 같은 삶을 살았지만 늘 아버지가 곁에 계신 것처럼 하늘에 대고 이야기하며 살았어요.

"충분히 열심히 살았고 늘 최선을 다해 삶에 임했다는 거 아시죠?, 아빠 덕에 힘든 시기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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