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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행진 02화

호르몬

by 민들레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


나는 잘 못 느끼는데 내 갑상선 수치가 낮단다.

부신 호르몬도 적단다.

의사가 안 피곤하냐고, 자꾸 살이 찌지 않냐고 물어본다.

피곤하다고 느낄 새가 어디 있었나.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는데.


고3 세 번, 재수 두 번. 수험생 뒷바라지를 5년을 했다.

5시에 일어나,

멀어서 6시에 출근하는 남편 아침 차리고, 애들 차례대로 깨워 밥 먹이고, 그 사이 출근 준비 하면서 빨래해서 널어놓고.

나도 7시 50분에는 나와야 되는데...

4시 30분 퇴근해서 장보고 저녁 준비 하고 있으면 6시에 현관문이 열리고 땡돌이 남편 퇴근 하신다.

저녁 차리고 8시면 막둥이 학원 끝나고 집 도착. 저녁 차리고 빨래 걷어서 개고 잠시 과일 먹으면서 뉴스 보고 있으면 10시 30분, 큰 아들 야자 끝나고 돌아온다.

석식은 먹었지만 한창 먹을 땐데 얼마나 배가 고플까...

다시 또, 저녁을 차린다.

공부한다고 힘들었을 테니, '힘내. 수고했어. 너 열심히 하고 있는 거 알아.' 라는 메시지가 전달 될 만큼 정성스레 차린다.

해줄게 이것밖에 없으니...

늦은 밤 12시에 재수하는 딸 데리러 버스 정류장으로 나간다.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데 남편은 매일 데리러 간다.

그 마음도, 내 마음이랑 똑같다.

열심히 해 주는 게 너무 고마워서.

딸은 지친 얼굴로 들어온다. 우리 집에서 두 시간 넘게 버스 타고 지하철 갈아 타가며 홍대 근처 미술 학원으로 간다. 그리고 또 두 시간 넘게 걸려 집으로 오고...

쬐끄만한 우리 딸... 집이 멀어서 미안하다. 시골에 살아서 미안하다.

애써 웃으며, 힘든 모습 안 보이려고 밝게 "다녀왔습니다!"

속도 깊은 내 딸.

이게 내 하루의 끝이 아니다.

남편은 자러 들어가고, 나는 딸아이 씻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 따뜻한 오미자 청을 마시라고 준다. 마시면서 딸이 하루 일과 보고를 한다.

미술은 재료비가 많이 든다. 소모품이니까.

우리 딸은 돈 많이 드는 그림을 그려서 미안해한다.

동생도 둘이나 있는데, 부모 부담 주는 것 같아 진짜 미안해한다. 그래서 재료도 아끼고, 점심 저녁도 편의점에서 해결한다.

난, 싫다. 해줄 만하니 밀어주는 거다.

지 생각만 하고, 밥도 맛있는 거 사 먹고, 재료도 너무 아끼지 말고. 쓰고 필요한 거 있으면 고민하지 말고

말했으면 했었다.


그땐 모이는 때가 아니고 나가는 때라고, 남편은 애들 돈 때문에 못 했었다 후회 안 들게 우리가 좀 더 아끼고 줄이더라도 애들 밀어 주자 했었다.

그 말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지금 생각해도 고맙고, 또 감사하다.

특별히 잘하는 것 없었다. 실력이 고만고만했던 애들이었다.

특별히 잘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잘하고 못 하고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시기에 본인이 뭘 해야 되는 지를 알고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이 멋졌고, 응원하고 싶었다.

그때가 아니면 해 볼 수 없는 건데, 그것을 하고 있다는 게. 그 뒷바라지를 해줄 수 있다는 게, 행복했었다.

우리 부부는, 그걸 보는 게 행복했었다.

돈을 모아 변두리에서 서울 근처로 이사 가는 것 보다, 출퇴근이 좀 더 편한 지역으로 이사 가는 것 보다,

애들이 원할 때 아낌없이 지원 해 주는 것이. 우리의 사는 이유고, 행복의 근원이었다.

눈치 보지 말고 요구해 주길 바랐는데, 세 녀석은 부모를 생각하느라 많이 절제를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그립다.


아침마다 주머니 열어 놓고 대기했던 그때가 그립다.

거실에서 자며 아이들 방 문이 열릴 때마다 깨서 뭐 줄까 물을 수 있었던 그때가,

그립다.

다 떠난 지금, 남편과 늘 그때를 그리워한다.

몸도, 주머니도, 바닥을 드러내던 그때가, 참 사는 재미가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지금 만큼 알지 못했었다.


오늘도 하늘이 맑다.

유모차가 지나가 애기인가 싶어 보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아지가 쳐다본다.

요즘 강아지들은 인형 같다. 정말 귀엽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언니도, 오빠도. 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한다.

메말라가는 세상에 정둘 곳이 강아지 인가, 싶다.

아이들의 웃음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강아지가 쓸쓸한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준다.

인간은 교감이 필요하다. 반려견이 참 큰 일을 하고 있다.

우리 큰 아들도 비숑을 키우는데, 말 못 하는 아들이란다.

지는 라면을 먹어도 구름이는 유기농 간식을 사 준단다.

속 터져서 너나 유기농 먹고 구름이는 아무거나 먹이라 했더니, 안 된단다. 탈 난단다. 시끼...


피곤하지 않게 컨디션 관리 잘해야 된다.

내 호르몬이 힘이 딸려 적게 나와도, 지금이 내 인생에 제일 한가하고 편안할 때이니 괜찮다.

잘 먹고. 잘 쉬고. 그동안 수고 해준 호르몬 달래 가면서. 같이 사이좋게 늙어 가자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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