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하고 싶어? 자!"
형이 원하는 듯한 물건을 냅다 쥐어 줬었다.
"This is not what I wanted..." (이건 내가 원하던 게 아니야..)
"이게 좋아? 알았어 더 줄게!"
다시 생각해도 그때 그 친구의 표정은 매우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내가 영어 해석을 너무 잘해버린 탓 인가.
그 친구한테 원하는 걸 쥐어줄 때마다 미소를 자주 지었었다.
아마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 친구는 어릴 때부터 미국에 살다와서 그런지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다.
그래서 많이 놀리기도 했지만, 우리는 친했다.
그 당시 장난꾸러기였던 나는
유치원에서도 독특한 성향과 성격 때문에 가끔 애들을 울리기도 했고,
엄마가 가끔씩 유치원에서 선생님들과 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좀 유별났다고 하셨다.
내가 5학년 때였다.
나를 좋아하던 여자애가 방과 후 나에게 수줍게 편지를 주었는데,
그 편지를 확인하고는 이 상황을 어찌 해결해야 할지 몰랐었다.
왠지 이 광경을 본 내 친구들이 나를 놀릴 것만 같았다.
나는 급하게 그 아이의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무턱대고 전부 지우개로 지워 버렸다.
빼곡하게 쓰여진 그 친구의 고백을 나의 철없는 행동으로 인해
나를 몰랐을 때의 감정으로 강제적으로 돌려놓아 버렸다.
강제적으로 비워버린 이 공간을 나는 어디다 저장해둬야 할지 몰랐다.
나는 눌러써진 자국이 남았지만 철저하게 비어있는 이 종이를 그 여자 아이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그저 고백을 받았다는 것이 너무너무 부끄럽고 또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지나가다 마주친 그 여자아이에게 편지를 돌려주었다.
답장이라 생각했을 그 아이가 자신이 써 내려간 진심이 빈 공간이 된 것을 확인한 그 마음이 어땠을지..
나는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꽤 유별난 성격이었고 그건 네 삶에서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나는 그 당시 수학에 굉장히 빠져들어 있었고 심지어 수학을 매우 잘했다.
학교 대표로 경시대회도 자주 나갔고, 점수 또한 매우 우수했다.
틈만 나면 문제를 붙들고 앉아서 여섯 시간씩 밥도 먹지 않고 앉아 있곤 했었다.
타고난 재능덕에 학교에선 전적으로 나를 밀어줬으며 나의 인지도도 올랐다.
학교 내에서나 외부에서, 나의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게 뿌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약간의 압박감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나는 그들의 기대보다 더 잘 해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고 그 갈망은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가끔씩 나에게 여러 가지 제안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친구들도 있었다.
"야, 축구 안 하냐?"
"어, 너네끼리 해. 나 이것만 하고."
"아 언제까지 해. 빨랑 나와."
"먼저 가라~ 형은 지금 바쁘다."
"우웩 형 이래. 얘들아, 우리 먼저 놀자."
연필과 볼펜을 번갈아가며 끄적이는 소리가 축구장의 괴성보다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쌀쌀해지기 시작한 12월의 겨울.
한국에 놀러 온 이진이 형과 곧 있을 약속을 기대하며 늘 걷던 길을 걷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미국에서 한국으로 놀러 온 형은, 한국에서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적어서 오곤 했다.
하고 싶은 것들이 무려 스무 가지가 넘는다.
집과 가까워졌다는 걸 알려주는 익숙한 횡단보도의 짧은 신호를 기다렸다.
띠링-
[아들.]
[왜?]
[진이 많이 아프대]
[?]
신호가 바뀌었다.
항상 풀고 있던 외투의 단추를 잠갔다.
[지금 열이 40도가 넘는대. 일단 집으로 와.]
[갑자기? 많이 안 좋아?]
[엄마도 연락 기다리는 중이야. 집에 와서 이야기하자.]
[...]
나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걸어갔다.
생각이 많았다.
고백받아서 어쩔 줄 모르던 그때의 시간보다, 나는 더 많은 시간을 생각해야 했다.
차라리 쏟아지는 수학문제를 푸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고개를 들었다.
푸르게 느껴지던 하늘이 알고 보니 갈색빛이었다.
먼지가 가득하게 느껴지는 오후.
나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발걸음을 옮기며,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