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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보호자 05화

나만 아는 기억

유화

by 솜Som



한국을 떠나야 하는 날.


엄마와 함께 이사를 갈 준비를 끝냈다.

내 방안에 있던 많은 물건들이 비어져 있었다.

왠지 마지막일 것 같은 텅 빈 그 공간에서, 이젠 커튼도 없어서 막을 수 없는 강한 한낮의 빛과 그로 인해

비추어져 느낄 수 있는 먼지가 담긴 공기를 느끼며

작은 손으로 작은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작고 텅 빈 공간 속,

엄마와 나 그리고 아빠를 그려 넣었던 기억이 난다.


늘 내 그림을 좋아해 주시던 아빠에게 선물하고 싶어, 아빠 방 가까이 다가가 문을 열려는 그때,

익숙한 높이의 두 음성이 들린다.


싸우는 소리.

방문을 열지 않기로 하고 등을 돌렸다.

간혹 들리는 대화내용은 어차피 늘 이해되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분명 좋은 일들은 아니었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인생 처음으로 혼자서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쩌면 저 문 밖이 더 편안할지도 모른다는 충동적인 생각이 어렸던 나를 움직이게 했다.

기껏 집 밖으로 뛰쳐나가 도착한 곳은 집 앞 공원이었다.

대차게 밖으로 나갔지만 정작 나는 놀이터 바닥에 혼자 앉아 작은 돌멩이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엄마아빠는 왜 싸우는 걸까? 그래도.. 이젠 떨어져서 사니까 안 싸우시겠지?

그게 우리 가족에게 분명 더 좋은 일이 될 거라고 엄마아빠가 말했으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야. 우린 다시 다 같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펑”


생각이 깊어지는 중에 어딘가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그림을 그리는 걸 멈췄다.

귀가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멀리서 그네를 타고 있던 어린 남자아이가 넘어지고, 그 옆에 있던 아이들도 놀라 불안해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 여자아이가 세명의 아이들을 미끄럼틀 아래의

작은 공간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곧 혼자서 뛰어나와 어디론가 뛰쳐갔다.


몇 초쯤 지났을까.

아까 미끄럼틀에서 넘어졌던 작은 꼬마 아이가 혼자 나오더니

여자아이를 향해 소리치며 작은 걸음으로 뒤따라갔다.


“누나..!.”


무엇 때문인지 난 그 아이를 따라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의 뒤를 따라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상하게 공기가 조금씩 탁해졌다. 숨을 쉬기가 조금씩 어려웠고 점점 뜨거운 기분이 들었다.

따가운 연기가 두 눈을 가릴 때 즈음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야!”


누나를 찾던 그 꼬마 아이였다. 눈이 따가워 가던 길을 멈추다 나와 부딪힌 듯했다


“.. 괜찮아..?” 내가 물었다.


“응...”


더 뜨거워지는 열기를 느끼며 우린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의 집이 불타고 있었다. 엄청난 연기가 마치 모든 걸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난 아이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가지 말자..”


뉴스나 그림에서만 봤던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


“.. 우리 집…?”


아이가 한 말에 내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분명 자기 집이라고 한 것 같다.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가려주기 시작했다.

난 멍하니 서있는 아이를 보며 정신을 차려야 했다.


“걱정 마. 소방관 아저씨들이 구해줄 거야!”


“정말? 멋지다!!!”


“맞아, 정말 멋지지.”


서 너살 정도로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에게 난 아주 확신 있게 대답했다.

나는 아이의 손을 더 꼭 잡고 불이 난 반대방향으로 돌아 공원 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소방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유치원에서 부모 초청 수업 때 들었던

소방관 아저씨들의 생활이 어땠는지 기억나는 대로 설명해 주었다.

아이가 내게 물었다.


“누나, 소방차 그릴 수 있어?”


갑작스러운 아이의 질문에 좀 전에 열심히 설명하던 때와는 반대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릴 수는 있는데.. 근데 종이가 없어..”


생각 없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대답했는데 아까 가지고 있던 작은 연필과 구겨진 종이 하나가 손에 잡혔다. 종이를 펼쳐보니 내가 집을 나오기 전 아빠에게 보여주려 그린 우리 가족들의 얼굴이었다.

아이가 그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누나가 그린 거야?”


“응, 누나 가족인데 이제 곧 떨어져 지낼 거야.”.


“떨어져…? 왜?”


아이가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로 물었다.


“음…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난 우리 가족이 그려진 종이의 뒷장에 소방차를 그려 아이에게 주었다. 아이는 신이 난 표정을 하고 그 그림을 한참을 처다 본 후 나에게 다시 건넸다.


“왜..? 이상해?”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에게 말했다.


“누나 가족 이잖아. 누나 거야. 이제 떨어져서 지내면 더 잘 가지고 있어야 돼.”


아이가 덧붙여 말했다.


“소방차 그림은 내가 기억했어! 그러니까 다시 돌려줄게. 히히”


난 갑자기 이 꼬마 아이의 이름이 궁금했다.


“바유화! 너 어디 있었던 거야? 빨리 와!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어!”


엄마가 많이 화가 났는지 내 팔을 세게 끌어당기며 날 데려갔다.

그 아이와 점점 멀어져 갔다.


‘이름을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일은 시장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아저씨가 나에게 쥐어준 붓과 함께 ‘나만 아는 기억’으로 서랍 속 깊이 저장되어있다.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




그토록 말이 없고 소극적이던 내가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었다는 사실을,



그날.

그 일이 있은 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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