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나로서 온전히 쓰이길 바란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신과를 다니며 불면증, 우울증 치료를 했지만 재 취업의 의지도 앞으로의 어떤 계획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매 순간 불안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틀어놓은 아침뉴스 속 사람들이 모습이 보였다.
'저 사람들은 어딜 그리 바쁘게 가나, 서울역이 엄청 크구나...'
'난 뭘 하고 있는 거지? 할머니 등이 저렇게 구부정했었나?...'.'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꺼져있던 스위치가 탁 켜지듯 주위가 환해지며 무언가가 나를 대문으로 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부터 뭔가에 홀려 매일 오전 아홉 시만 되면 난 집을 나섰다. 서울역과 광화문, 여의도, 신도림 등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으로 매일 출근을 했고 그곳이 어디든 앉을 수 있기만 하면 자리를 잡고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다들 어디로 갈까? 무슨 일을 할까? 유추해 보는 것이 나의 하루 일과였다. 그 이후엔 그 근처를 배회하다가 밥을 먹고 집으로 왔다.
아무도 시키지 않는 정해진 출근시간은 나를 일상으로 돌려놨다.
내가 쓰일 곳,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고 싶었다. 쓰임이 없는 곳엔 두 번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기에 시간이 걸려도 안정된 직장을 구하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지만 생활비가 점점 떨어져 갔다. 또한 더 이상은 여든을 앞둔 할머니에게 기댈 수 없었기에 나는 일을 구하기로 결심을 했다. 아주잠깐 하나뿐인 언니에게 슬쩍 기대려고 했지만 눈치가 빠른 언니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시집을 갔다. 그렇게 나는 일을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작성하고 알바사이트와 취업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대 보험이 되는 사무직을 알아봤다. 경리직과 비서직, 회계일 등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정리를 했다. 매일 이력서를 보내고 연락을 기다렸지만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번듯한 직장이 아니어도 돈을 벌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20대 초반 어린 나이였고, 나를 찾는 곳은 많았다. 편의점과 마트, 화장품 가게, 웨딩홀서빙, 베이비스튜디오 스탭, 팬시문구 캐셔, 약국 보조 등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보냈고 연락이 왔다. 알바 면접의 결과는 거의 다 합격이었다. 번번이 면접에서 낙방을 하던 자괴감은 자신감으로 바뀌었고 나도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나에겐 알바면접의 합격 노하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옷차림과 이력서였다. 사무직으로 직장을 알아보느라 정장을 입고 면접을 보러 가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고 난 알바면접 때에도 투피스 치마 정장을 입고 나갔다. 이력서까지 봉투에 준비해서 간 아르바이트생을 떨어트릴 점주는 없었다. 준비된 사람에게만 기회가 온다는 걸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한 알바는 화장품 판매였다. 일은 고되지 않았고, 선배들도 좋았지만 하루 종일 구두를 신고 서있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게 됐다. 나중엔 굽이 없는 구두도 신어봤지만 그래봤자 다리부종을 없앨 순 없었다. 두 번째로 한 알바는 베이비 스튜디오 스탭이었는데 매일 귀여운 아기들을 만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지원을 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온순한 아기들도 낯선 환경인 스튜디오에 도착만 하면 빽빽 소리부터 지르기 일쑤였고 아기들이 울지 않으면 내가 울 것만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일이 끝난 밤에도 아기들이 우는 환청이 들렸고 이명에 시달리다가 겨우 잠이 들어야 했다. 세 번째 알바는 웨딩홀 서빙으로 몸은 고됬으나 일은 나름 재미있었다. 유니폼을 입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음 한 손엔 큰 쟁반을 다른 한 손엔 음료수병을 일곱 병씩 꽂고 다녔다. 그렇게 한 바퀴 쭉 서빙을 돌고 나면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면서 이곳이 나로 인해 돌아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었다.
네 번째 알바는 편의점 캐셔 일이었다. 나는 이 일을 제일 오래 했는데 거의 모든 편의점을 파트타임으로 돌아가면서 했다. GS, CU, 세븐일레븐, 미니스톱 등 여러 군데의 편의점을 다 섭렵하다시피 했고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매뉴얼들을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배웠다. 편의점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게 나쁘지 않았고 선입선출로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물론 점주분들을 잘 만나야 했지만 내가 겪었던 사장님들은 다 좋으신 분들 이셨다. 대망의 다섯 번째 마지막 알바로는 약국 보조였다. 주로 약국 카운터 앞에서 아이들에게 비타민을 나누어 주거나 처방전을 받아서 컴퓨터 프로그램에 입력하는 일을 했다. 타자는 느렸지만 거의 매일 같은 약들을 입력하는 일이라 어렵지 않았고 손님을 응대하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던 터라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똑같은 일과와 위로 올라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약국을 다니는 동안 내내 나를 괴롭혔기에 그만두게 되었다. 나는 알바를 하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배우러 다녔다. 책이 좋아 제본을 배우러 다니고, 북아트 지도사 자격증을 따고, 네일아트를 배우고, 전공을 살려 영양사시험도 다시 준비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4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난 이십 대 중반인 스물일곱이 되었다.
그해 여름, 진득하게 한 가지 일을 못하는 내가 걱정이 된 아빠가 날 조용히 부르셨다. 아빠는 내게 동대문 새벽시장에 나가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다. 아무래도 아빠 눈에는 내가 의지박약에 심신이 약한 아이로 보였기 때문에 기가 센 곳에 가서 힘든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나는 아빠의 제안을 반은 수락해 동대문에서 남대문으로 시선을 돌려 이력서를 냈다. 동대문의 기 센 언니들은 두렵지 않았는데, 남들 자는 시간엔 자야 한다는 이상한 신념에 대한 결과였다. 그렇게 남대문 액세서리 상가에서 판매직원을 구한다는 공고가 눈에 들어왔고 그곳에 이력서를 보내게 되었다. 다행히 이력서를 보낸 곳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고 이번에도 전투복인 투피스 정장과 이력서를 들고나갔다. 결과는 바로 합격이었고, 그렇게 남대문 액세서리 상가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라 나로서 온전히 쓰이길 바란다.]
*카타르시스
본래 '카타르시스 뜻'은 그리스어로 '깨끗하게 하다' 또는 '정화하다'를 의미한다.
원래는 의학적인 용어로, 몸속의 불순물이나 독소를 제거하는 과정을 의미했으나, 지금은 심리적 용어로 사용되며 감정을 해소하고 치유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우리 마음속의 억눌린 감정이나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과정이 곧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