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상황이라도 다른 처방이 나오는 이유에 대하여
첫 직장에서 빌런을 만나 우울증이 재발했고,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불면증은 나날이 심해졌으며 어떤 날을 아예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낮과 밤이 구분이 안 되고 일어나는 시간도 제 각각이었다. 몸이 다시 쪼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에 어렸을 적 *공황장애가 다시 시작된 건가 하는 걱정으로 두려움이 앞섰다.
결국 난 부천에서 제일 큰 병원의 정신과에 가게 되었다. 엄마는 별거 아니라고 그냥 불면증이라고 병원 의자에 멍하게 앉아있는 나를 보고 말했다. 엄마의 눈은 나를 보고 있는데 입은 옆 사람들을 향해 있었다. 내 딸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혹시나 해서 온 거니 오해하지 말라고 사람들한테 설명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신경 안 쓰는 것 같은데 엄마 때문에 더 주목을 받는 것 같았다. 대기석에 앉아 있은 지 삼십 분이 지나서야 내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그날의 대화다.
의사 : 어떻게 오셨나요?
나 : 잠을 통 못 자서요. 불면증이 심해진 건지 모르겠어요. 낮과 밤이 구별이 잘 안 돼요. 두 달 전쯤 직장을 그만뒀어요. 전 직장에서 상사가 집요하게 괴롭혔거든요. 그거 때문인지 어렸을 때 공황장애가 다시 재발한 것 같기도 하고... 자려고 누우면 몸이 풍선처럼 거대하게 부풀면서 커지다가 다시 개미보다 더 조그맣게 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아주아주 작게요. 어떨 때는 깜깜한 개미굴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하면서 무서운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잠을 못 자는 걸까요? 선생님??
의사 :....(5초 동안 말이 없었다.) 과거가 현재를 이어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 같네요. 우울감도 있으신 것 같고요. 직장 내 괴롭힘이라..
나 : 네?... 에?..(잘 안 들리는데 뭐라고 그러는 거지, 왜 이렇게 웅얼웅얼 거리는 거야.) 우울감? 우울감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의사 선생님은 머리가 하얀 70대쯤으로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나는 의사 선생님을 보자마자 나이가 너무 많아서 진료를 잘 못 할 거라고 확신했다.)
의사 : 우선, 불면증 약을 지어 드릴게요. 혹시 다른 동반되는 증상은 없나요?
나 : 불면증 약을 먹으면 증상이 사라질까요? 안될 것 같은데.. 다른 증상은 음.... 없는 것 같아요.
(내 생각이 맞았다. 질문 하나에 벌써 처방을 내리다니, 돌팔이다.)
의사 : 식사는 잘하시나요? 잠자는 거 말고 화장실은 정상 적으로 가시나요?
나 : 네 그런 것 같아요. 밥은 그래도 잘 먹는 것 같아요. 화장실도요,
(별 걸 다 물어보네, 근데 나의 마음 상태에 대해서도 물어봐야 되지 않나?)
의사 : 다행이네요.
나 : 네????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이 할아버지가, 의사가 맞긴 한가? 약 지어줘도 안 먹어야지.)
의사 : 한 달 치 약 지어 드릴게요.
나 : 약 먹어도 안 나으면 어떡하죠? 다시 와야 되나요? (괜히 왔다. 괜히 왔어. 엄마만 속상하게 하고, 그냥 심리안정센터로 갈걸, 나는 제대로 된 상담이 받고 싶은 건데, 여기서 지어준 약은 절대 안 먹을 거야. 다시 안와, 아 짜증 나.)
의사 : 괜찮아질 거예요. 한 달 치 약 우선 드셔보시고 그래도 안 나으시면 그때 다시 오세요.
나 : 네.....
십 분쯤 짧은 질문들과 대답이 오고 갔고, 난 파란색으로 된 타원형 모양의 알약을 처방받았다. 병원을 나오면서 환자얘기엔 별 관심도 없어 보이는 의사를 내내 원망했다. 정신과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건지, 정신과에 가기만 하면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내 얘기를 집중해서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모든 걸 쏟아내고 펑펑 울고 나오면 병이 씻은 듯 다 나을 거라는 희망도 있었다. 그렇게 큰 마음을 먹고 간 건데 의사가 저 모양이라니 속상했다. 집에 온 뒤 난 약을 먹지 않았고 버리지도 못한 채 책상서랍 아무 데나 던져 놓았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불면증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버티며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는 캄캄한 내 방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울면서 기도 중이셨다. 아마도 매일을 날 위해서 저리 기도하셨으리라, 나는 할머니가 너무 안쓰러웠다. 손녀딸들을 살리기 위해 고향까지 버리고 온 가여운 분을 더 이상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기도가 끝난 후에 주름진 손이 내 이마에 닿았고, 난 이 손길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내 방에서 나간 후 나는 조용히 일어나 의사한테서 처방받은 약을 찾아 꺼내 먹었다. 한 달 치를 다 먹으니 불면증은 어느새 사라졌고 나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두 번째 만난 의사 선생님은 돌팔이 같지 않았다. 처음 진료할 때 보다 더 진중히 내 얘기를 들어주셨고,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거리며 호응까지 해주셨다. 자세히 보니 의사 선생님은 귀가 컸고, 그 큰 귀에는 연한 갈색 보청기가 끼어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보청기가 생각이 났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을 아끼신 이유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아마도 자기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제야 내가 정신이 들어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건지, 아니면 그동안 의사 선생님이 변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번에는 불면증 약대신 우울증 약을 처방받았고, 선생님은 이약을 다 먹고도 우울감이 계속되거나 다른 증상이 동반되면 병원에 다시 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알겠다고 했지만, 두 번의 만남을 끝으로 더 이상은 병원에 올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면증
밤에 잠을 자지 못하는 증상. 신경증, 우울증, 조현병 따위의 경우에 나타나며 그 외에도 몸의 상태가 나쁘거나 흥분하였을 때에 생긴다.
*공황장애
뚜렷한 근거나 이유 없이 갑자기 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공황 발작이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병. 공황 발작이 일어나면 심장이 빨리 뛰고 호흡이 가빠지는 등의 증상을 보이며 곧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