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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직장에서 빌런을 만났다.

서점 취직 후, 우울증이 재발했다.

by 다정한 지혜씨


대학 졸업 후, 그제야 나는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대학에 갈 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나는 진로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생일이 빨라 일곱 살에 일찍 학교에 들어가 얼이 빠졌던 때처럼 사회생활에 던져진 나는 팔다리가 아직 자라지 않은 올챙이 같았다.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뭔지에 대해서 생각했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게 없자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친구와 함께 텔레마케팅 일을 해보려 했지만 첫날부터 듣는 욕설에 혼이 나갔고, 연이 있던 친구마저 피라미드행을 타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 책을 만났고 평소 애정하던 것과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어서 첫 직장으로 서점을 택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 동네에 자그마한 독립서점을 여는 것을 목표로 삼고자 열심히 일했다. 책에 진심인 날들이 하루하루 평안하게 흘러갔고 매일 책을 만지고 냄새를 맡고 신간을 제일 먼저 만나는 일상을 즐겼다. 책을 사러 오는 손님도, 일도, 동료들도 나쁘지 않았다. 책마다 특유의 향을 내는 것들이 있었는데 책을 만드는 과정 중 어떤 작업이 그런 향을 나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책에서는 초콜릿 냄새가, 어떤 책에서는 짙은 향나무 냄새가 나기도 했다.) 숲의 냄새와 설탕의 냄새가 섞인 서점에서 나는 행복했다.


하지만 어딜 가나 있다던 *빌런이 그곳에도 있었다. 악인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했지만 나는 피하질 못했다.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나에게 빌런인 직장상사가 있는 서점은 악마의 집과도 같았다. 팀장이었던 그녀는 참 집요하게도 나를 괴롭혔다. 갓 스무 살이 넘은 내가 뭐가 그렇게 싫었는지 아직까지도 이해를 잘 못하겠다. 그녀는 성희롱도 서슴지 않게 해댔고, 심부름도 나만 시켰다. 밥을 많이 먹어 똥배라도 나온 날이면 어김없이 임신한 게 아니냐며 놀려댔다. 그러다 직장 내 성희롱 교육이 있던 날 일이 터졌다. 같은 이성한테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면 신고하라는 주최자의 말에 나는 그야말로 꼭지가 돌았다. 하루 종일 그동안 들었던 그녀의 모욕적인 말들이 떠올랐고 난 일부러 진상을 골라 계산실수를 해 그녀에게 엿을 먹였다. 매일을 당하던 내가 못 참고 일을 저지르자 그녀는 나를 향해 책을 던졌다. 그렇게 좋아하던 그것이 무기가 되어 내 명치에 박혔다. 그다음 날 멍든 배를 안고 퇴직서를 냈다. 쌍욕을 해대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통쾌했다. 이제는 니년이 뭐라 하든 더 이상 듣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책을 읽고, 첫 직장을 잃게 되었다는 사실에 슬펐다.


퇴사를 하고 매일같이 빌런한테 속으로만 들리는 욕을 했다. 내 귀에, 나만 들리는 욕을 참 열심히도 했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 그 빌런을 더 이상 안 봐도 된다는 현실에 몸은 편해졌지만 마음은 더 고달팠다. 빌런이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길, 그동안 한 짓들이 낱낱이 까발려져서 곤경에 처에 지기를 바라고 바랬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고 매일을 증오하는 마음을 살다 보니 나 자신이 점점 병들어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루하루가 부정적인 생각들로 채워지니 불면증이 생겼고 낮과 밤이 구분이 안 되는 날이 이어졌다. 불안이 끝이 안 보이는 까만 우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만 같은 날들이 이어져 계절이 바뀌자 할머니는 내게 엄마와 같이 병원에 가보는 게 어떻게냐고 말씀하셨다.


'똑똑'

할머니 : 지혜야, 지혜야, 일어나 봐.

나 : 응?.....? 지금 몇 시야 할머니??

할머니 : 다섯이야 저녁 먹어야지, 왜 그렇게 잠만 자. 저번 몇 주는 잠을 안 자더니, 이제는 왜 그렇게 잠만 자는 거야.. 할머니 무섭다.. 지혜야, 엄마한테 연락해서 병원이라도 가보면 안 되겠니...

나 : 무슨 병원?.. 나 안 아픈데.....

할머니 : 니 얼굴 좀 봐, 거울 좀 봐라. 귀신같아. 눈은 텅 비어 가지고 뭔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정신과 가봐, 정신과가 나쁜 게 아니야. 요새는 사람이 인식이 많이 좋아져서 괜찮아.

나 : ??!! 정신과.....?....

[할머니 눈에서 물이 나온다. 눈물이다. 나를 보면서 슬퍼하시는 것 같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우울을 집으로 데려오지 않기로 약속한 나는 어디로 간 거지..]


나는 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도 몰랐는데 할머니는 어쩌면 나보다 더 날 잘 아셨던 것 같다. 어렸을 적 소아우울이 성인우울증으로 자라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계절감도 모르게 봄에서 여름이 되도록 두꺼운 기모 맨투맨을 입고 생활했던 나는 그렇게 엄마와 함께 처음으로 정신과를 가게 되었다.




*빌런

악당, 나쁜 행동, 범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어떤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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