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제일 사랑했던 그들의 이야기
육 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다. 그로부터 일 년 후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울에서 내려오셨다.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등지고 내린 결정이었다. 엄마와는 연락만 하고 간혹 가다 밥만 먹는 사이가 되었고 두 분이 내려오자마자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가끔 나 자신이 짐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와 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네 식구가 되었다.
생계를 꾸려야 할 큰 아들이 갑자기 없어지자 두 분은 잠깐 당황하셨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동네 부업집을 샅샅이 뒤져 일을 따냈다. 부업의 종류는 단순작업으로 양말을 뒤집어 스물네 개씩 열두 켤레로 짝수를 맞춰 노끈으로 묶는 일이었는데, 가격은 개당 20원으로 적었지만 두 분은 매달 백만 원이 넘는 큰돈을 벌으셨다. 나와 언니는 무럭무럭 자랐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양말에 손이 스쳐서 부르트고 피가 나도 손녀들을 키우느라 일을 쉬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평소 말수가 적었지만 다정했다. 나와 눈만 마주치면 환하게 웃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할아버지의 미소가 노을의 숨을 닮은 듯 따뜻하고 아름답다고 종종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대학교 일 학년 위암말기 판정을 받으셨고 그 후로 일 연뒤 돌아가셨다. 일흔여섯의 나이로 술과 담배를 친구처럼 가까이 둔 게 화근이었다. 나와 할머니는 일 년 가까이 집과 병원을 오가며 할아버지의 병간호를 했다. 그러나 이미 온몸에 암세포가 전이된 할아버지가 다시 건강해질 일은 없었다. 난 오직 할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더 아프지 않기만을 바랬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식구들이 다 보는 곳에서 눈을 감으셨지만, 친구하나 없는 외로운 삶이셨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집에 돌아와 할아버지의 유품 정리를 했던 게 생각이 난다. 할아버지의 하얀 모자와 하얀 잠바, 깨끗한 운동화 한 켤레, 지팡이, 갈색 보청기, 피다남은 담뱃갑를 끌어안고서 나는 정말 많이도 울었다. 그 뒤로 몇 년을 길을 걷다가 할아버지와 닮은 사람을 보면 몰래 따라가기도 했을 정도로 난 오랜 시간 그를 많이 그리워했다.
할머니는 꽃다운 나이 열여섯에 할아버지를 만나 *정략결혼을 하셨다. 몇 번 본 적도 없는 남자를 남편이라고 부르며 모진 시집살이를 하셨고, 그 와중에 *6.25 전쟁까지 겪으셨다. 전쟁이 끝난 후 남편의 얼굴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총상이 새겨졌고, 할머니는 전쟁 이후 찢어지게 가난해진 집안을 일으키느라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차란 만장한 삶을 사셨다고 했다. 물을 길어 다른 집으로 배달을 하거나 삯바느질을 하며 돈을 벌었고 시장에서 국수를 팔며 가정부로 일하셨다고도 했다. 평생을 자식 뒷바라지와 시댁, 친정까지 대가족을 이끌며 사셨던 터라 할머니의 걸음은 남들보다 늘 한 걸음씩 빨랐다. 할머니는 통통한 체격에 키가 작았지만 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니셨기에 본인의 키보다 항상 한 뼘은 더 커 보였다. 할머니는 항상 나와 언니를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고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할머니의 기세는 나마저 의기양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는 어딜 가나 할머니와 함께였고 그 사실이 든든했다. 중학교 때부터 건망증이 심했던 나는 도시락과 준비물 등을 챙기지 않거나 혹은 챙겨놓곤 그냥 나가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매번 내가 집에 놔두고 온 물건들을 학교에 가지고 오셨다. 어떤 날은 일부러 준비물을 놔두고 온 적도 있었는데 학교에 오신 할머니를 친구들이 "지혜야, 너희 할머니 오셨어."라고 얘기하는 게 좋았다. 글을 몰랐던 할머니를 학교에 다니고 싶었던 할머니를 그렇게 라도 나는 학교에 부르고 싶었나 보다. (나는 아주 가끔, 할머니와 친구가 되어 학교에 같이 등교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나는 실수인 척 할머니를 "엄마"라고도 불렀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어린 손녀가 불쌍해 모르는 척 "응"이라고 대답해 주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무지개처럼 밝아졌다. 우리는 다른 어떤 모녀 지간보다도 더 끈끈한 사이로 성장했고 엄마, 아빠의 사랑이 필요한 사춘기 시절 난 할아버지, 할머니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그렇게 가장 찬란했던 순간이 무지개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정략결혼 - 가장이나 친권자가 자신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하여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키는 결혼.
* 6.25 전쟁 -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에서의 전쟁.
6.25 전쟁은 2025년에 75주년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으로부터 광복을 했지만, 자주독립은 하지 못한 상태였다. 남한은 미국으로부터 도움 및 개입을 받고,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도움 및 개입을 받았다. 그렇게 남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는 인민공화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점점 정치적 갈등이 심해졌다. 결국, 서로를 자신의 이념에 맞게 굴복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6.25 전쟁은 한국전쟁으로도 불리며 전쟁기간은 총 3년 1개월 2일로 1950년 6월 25일에 시작하여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을 맺었다. 6.25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한국군 총 175,801명, 유엔군 37,902명이으로 총 16개국이 우리나라를 위해서 참전을 해 주었다. 하나의 국가를 위해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지원한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