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봄이면 할아버지가 사다준 진분홍색 바람막이를 입으셨다. 봄이 왔는데도 할머니는 바람막이 안에 얇은 옷을 적게는 두 개, 많게는 네 개까지도 입으셨다. 할머니는 여름에도 얇은 내복을 빼놓지 않고 입으셨다. 열이 많은 나는 그런 할머니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여름 에어컨 밑에서 할머니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쓰고 자야만 했다. 얄궂은 에어컨은 연결하는 선이 짧아 할머니의 침대 머리맡에 밖에 연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여름내 한 침대에서 같이 잤다. 엄마랑 못 잤던 밤을 할머니에게 기대어 오래도록 함께했다.
할머니는 여름만 되면 할머니 방과 연결되는 베란다와 내방과 연결되는 베란다를 활짝 열어 사방에 바람이 통하게 만들었다. 더운 공기가 아무리 합쳐져 봤자지라고 생각했던 나도 뜻밖의 시원한 공기에 여러 번 놀라기도 했다. 여름 내내 할머니는 남대문시장에서 내가 사다 준 파란색 폴리 반팔티로 한 계절을 나셨다. 가을이 오면 할머니는 봄에 있던 진분홍색 바람막이 대신 주황색의 누빔 야구잠바를 꺼내 입었다. 언뜻 보기에 내 눈엔 할머니는 색깔로 계절을 구분 짓는 것처럼 보였다.
더위보다 추위를 탔던 할머니는 이상하게 겨울을 가장 좋아했다. 뽀드득 밝히는 눈과 마음껏 여러 겹 껴입을 수 있는 내복이 좋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털이 안쪽에 달린 고무신 같은 신발을 겨울만 되면 하나씩 시장에서 사가지고 오셨다. 2만 원짜리의 그 작은 난로가 겨울 내내 할머니를 지켜주었다. 내가 시집을 간 뒤 일주일에 한 번 나와 밥을 먹고 경로당으로 향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장갑과 목도리를 칭칭 감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던 할머니는 연두색패딩을 좋아하셨다. 구십하나 여름, 할머니는 그 모든 옷들과 이별했다. 요양원에서는 그리 많은 옷이 필요하지 않다. 색색의 옷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 고모 손에 버려졌다.
할머니의 옷들을 계절에 따라 색깔별로 하나씩 쟁기고 있었어야 했는데 지키질 못했다. 살아계신 엄마옷을 깡그리 다 버릴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내 잘못이다. 작년 겨울이 오자 나와 언니는 오랜만에 할머니옷과 내복을 사러 다녔다. 아직 내가 고른 옷들을 입을 수 있는 고운 몸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유난히 추운 것 같다. 오늘도 영하 10도로 한파주의 알림 문자가 연달아 오고 있다. 밖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듯 녹지 못한 눈이 애처롭게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