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애절함
봄비의 무상함
- 김 중 근
일주일 내내 장맛비처럼 봄비가 내린다. 강풍을 동반한 북동풍이 차가운 겨울을 밀어내니 그 성깔이 장난이 아니다. 손끝과 발 끝이 시리다. 봄 비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요 희망이라 했는데 불안과 두려움이 여전한 것은 왜 그럴까?...여전히 사회적으로 불안 요소가 많고 정치권 행태들이 국가 바로 세우기와 거리가 먼듯하다.
다람쥐 채바퀴처럼 24시간 반복되는 나날은 되풀이 되어서 다시 돌아오고 어디로 가는지....언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생(生)이 끝날지 모르지만 내 인생에 붙어 함께 가는 세월(歲月)은 야속하기만 하다. 얼마전 가깝게 지내던 선배님께서 사순절 시기에 하늘의 부름을 받아 이승을 떠나니 마음 한편이 뚫리고 휑해진다. 세월이 무상하게 느껴진다. 영롱한 이슬로 온몸을 치장하고 꿈만 파먹고 살았던 이상(理想)도 못 견디어 떠나는 생을 뭘 그리도 아등바등 살다 가셨는지...텅 빈 가슴 속에 있었던 인연(因緣)들이 왜 이다지 애닯고 서글픈지 모른다.
정말이지! 이맘 때이면 멀리서 꼼지락거리는 아지랑이가 언 땅을 풀어헤치는 소리가 들리고 들로 산으로 나물 캐는 아낙들의 모습이 아련한데, 앙칼진 시올케처럼 날씨가 사납다. 영동 지역과 중북부 지역엔 대설 주의보로 일기 예보가 요란하고 폭설로 여기저기 교통이 마비 됐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하필이면 복(福)도 없는 고인께선 무심히 떠난 것이다. 가끔 입맛이 없으면 이 맘 때 그는 갖은 양념으로 묻힌 취나물이나 냉잇국을 소리내어 드시던 구수한 그의 냄새가 그윽하다, 한참 동안 하늘에서 뿌려대는 봄비를 쳐다보다가 슬픔과 함께 내린 눈물을 감춰본다. 그는 지금 아무런 말도 못하지만, 눈물 감춘 그의 모습이 미소 띄운 노을을 적신 것 처럼 슬픈 눈빛이 연일 내린다.
늘 그 노을빛 그의 숨결을 느끼면서 같이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어느 날 부터인가 그가 은퇴를 하고 어느 호젓한 곳에서 지난 영광을 뒤로 하고 무심히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덧 시름이 찾아와 마음 정착 못하더니 강능 경포대로 남도(南道) 다도해로 떠돌며 다니다 부안 격포 어디에서인지 몸져 누웠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신문지 같이 얄팍해서 시들어가는 그의 몸에 가시같은 세상풍파(世上風波)가 뚫고 들어와 암으로 세상을 뜨고야 만 것이다. 백세 시대에 아직 갈 길이 멀건만 성질 급한 선배는 이승 길까지 재촉해 서둘러 가셨다. 환희로 붉게 채색된 노을같이 살았던 그가 씁씁하게 눈길 한번 줄 사이 없이 서쪽으로 넘어가는 석양같이 그렇게 화다딱 숨어버리듯 운명을 하셨다. 그는 그렇게 무상(無想)한 노을을 보내고 차가운 봄비만 뿌리고 떠나셨다. 그리워진 내 마음을 저버리고 떠나버린 그는 오렌지 빛 한 자락 걸어 두고 내 시린 가슴에 빨간 노을 하나를 묻어놓고 떠나셨다. 봄비에 묻어온 바람 속에 잡히지 않는 그의 음성(音聲)이 마냥 들리는 것만 같아서 제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차가운 봄비를 맞으며 서성인다,
혹 저편 넘어 하늘 아래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내리는 봄 비 속에 다른 소식이라도 비집고 나을까 싶어 우산을 받혀들고 선술집을 찾아 밖으로 나선다. 막걸리 한 대접에 부치개를 안주 삼아 허망(虛妄)함을 쏟아 붓는다. 홀로 흔들리는 빛바랜 억새 대궁의 슬픈 모습같이 마음 둘 곳 없는 이방인의 심정과 다를바 없다. 방문을 열면 그가 남기고 간 그림 한 점이 걸려있고 겹겹이 포개둔 사진 속에서 그의 몸이 베어난 소중함이 엄습해 온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였던가...누구나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있지만 이것이 내가 그와 함께 살았던 세상에 적용(適用)될 줄은 미처 생각조차 못했던 내 삶의 무상(無想)함이 봄비에 젖는다.
나는 이제서야 인생이 허무하고 덧 없슴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누구를 생각하면서 그리움이 내리는 봄비의 애절함은 빗줄기 속에 녹아 내린다.
- 2024년 2월 21일 밤 웅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