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길...
봄의 단상
- 김 중 근
금강변의 아침은 앞산의 초록 잎새에 젖은 안개로 자욱하고, 고요히 스며든 산(山) 빛으로 기지개를 켜서 내 눈 앞에 다가온다. 4월 초순의 푸른 산과 금강이 고요한 해와 함께 동틀 빛을 받는다. 금강에서 지펴낸 젖은 안개가 뒷편의 소나무 숲 사이로 번진다. 곰개나루에 퍼진 안개 속에서, 싱그러운 바람이 와서 눈을 씻는다. 밤 세워 상큼한 향기를 품었던 꽃 위에 스며든 여린 이슬이 동녘 햇빛을 받아 영롱하다. 아침 햇살 사이로 갓 피워낸 어느 집 굴뚝의 연기도 움찔거리다 올라간다. 한편 어디선가 솟아나는 봄의 기운(氣韻)이 신선한 향기가 되어서 한 자락의 미풍(微風)에 어디론가 날아간다.
빈 하늘 빈 대지(大地) 위에 촉촉히 돋는 이 봄, 어디선가 솟아나는 이 기운을 물 안개가 걷히는 산녘의 동틀 빛과 노을 빛이 다 지기 전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금강변의 웅포에서 그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어진다. 내가 사는 금강변 웅포의 전경(全景)은 햇빛 돋는 동편(東便)의 산과 안개 피는 금강에서 이름모를 산새가 날아오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봄 바람이 싱그러운 옆집의 농가(農家) 집 앞 마당에선 어미 닭을 졸졸이 따라다니는 병아리들이 빛 좋은 양지에 한가히 앉아 어미 품 속에 졸고있는 아름다운 모습도 볼 수 있다. 여유로움이 있는 밖의 전경이 너무 좋다. 자유로움 따라 눈길이 절로 쫒아간다. 평화로움이 넘쳐흐르는 농촌의 전원 향기가 들녘에 퍼지고 듣기좋은 새 소리에 잠자던 영혼이 맑아진다. 노란 병아리 졸음 천지에 자욱한 아지랑이 내리니 세상 평화 이곳에 모두 있다.
나들이 길을 따라 내려오니 올망졸망 삼삼오오(三三五五) 아이들이 모여있다. 꼬맹이들은 올챙이가 한참 꼬물거리는 또랑 길에 거리낌없이 팔과 다리의 옷 가랑이를 걷어붙여 들어가는데, 봄의 색을 한껏 띄던 하늘은 어느새 아이들의 까들어지는 웃음 소리로 요란하다.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 이름모를 풀 꽃이 하늘거린다. 눈을 돌리니, 제 새끼에게 줄 먹이를 물고 잽싸게 날아오르던 곤줄박이 한 마리가 목련 나무 가지에 앉아 숨을 고른다. 목련 위에 한 겹 두 겹 펴 바르던 봄 햇살은 싱그러운 바람 속에 갇힌 듯 싱싱한 빛을 쏟아낸다. 바람은 하늘가 꽃 잎을 수만의 파편으로 나르고, 목련화는 미망인처럼 땅바닥에 스러진다. 낙화(洛花) 빛 어지러운 꽃 잎이 바람에 날릴 때 마다, 침몰(沈沒)된 한 여인의 숨결처럼 미망인의 소복(素服)이 된다. 소박한 미소로 시작된 봄이었다. 봄은 푸른 선율과 새롭게 그 무한한 녹색시대(錄色時代)를 꿈 꾼다. 한껏 기품이 넘치는 자태를 과시했던 목련과 흐드러지게 피었던 개나리, 벚꽃들이 봄의 전령사들이었지만 이젠 햇살이 따가워서 노정(路程)의 역사를 끝내려는가보다.
나들이 길에 축복처럼 쏟아지던 황금 빛 햇살은 하늘이 그리도 곱더니 북극(北極)에서 밀려온 구름 숲에 숨는다. 한 뼘 두 뼘 정도의 구름 사이를 힘겹게 비집고 나오던 봄의 햇살이 칙칙한 구름 숲을 뚫지 못하고 그냥 주저 앉는다. 푸르름으로 피어 오르기까지 온갖 화려함으로 장식되었던 일장춘몽(一場春夢)의 눈빛은 금강변(錦江邊)의 안개 비에 젖는다. 봄 빛은 빠져 나올 길 없어 젖은 안개 비에 침묵(沈黙)한다. 맑은 매화 향기에 취해서 정신 줄 놓았던 매화도 떨어진지 제법 됐다. 이제 막 솟아났던 봄의 향취(香臭)를 놓치기 싫었던 봄날이었는데.... 점점 사라져 가는 봄을 잡을 수 없어 분분히 떨어지는 목련만 바라보다 끝내 침묵한다. 봄의 햇살은 이렇게 안개 비 나라에 머물고, 구름 속에서 봄은 환희와 꿈의 신비로 피어낸 칙칙한 바람과 춤을 춘다. 돌아오는 길에 송아지 울음 소리와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린다.
집에 돌아와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금강변 풍경은 시름을 잊고 살기에 너무 좋다. 때론 해 질 녘 발코니에 날아들 산새들과 어울린다. 커피 잔을 마주하고 앉아 시간 따라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과 자연을 배경으로 나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다. 바로 낭만이 성숙되는 시간이다. 아울러 샘물같이 맑은 영혼을 지닌 친구와 함께 보물같이 숨겨놓은 와인 한 잔 꺼내서 취할 수 있는 곳이기도하다. 더욱이 노을 향기에 취할 저녘 나절이면, 아무 욕심없는 목련같은 나의 여인이 있어 행복한 곳이다. 세상 살면서 아옹다옹 얼굴 붉히며 숨이 막혀 오는 세상이지만, 나는 세상을 붉게 다 잠그는 석양의 바다가 되는 기쁨처럼 우리집 발코니에 함께 앉아있는 시간이 행복하다. 어쩌면 남들은 대단치 않을 정감이겠지만 봄이 오는 금강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해질 때가 많다. 흐리든, 맑든 일년 사시사철 365일이 좋은 곳이다.
어느새 빗줄기가 굵어진다. 겨울 가고 봄 가듯이 빗속에 푸르름이 배어 나와 뜨거운 여름을 준비하는 이 봄이 아쉬울 뿐이다. 마치 걸인처럼 누추한 설움을 뒤로 하고 눈물만 흘리고 떠나려는 봄비가 서러워 보인다.
2023년 4월 어느 날 , 웅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