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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시작

그루터기와 봄의 인사

by 수련 Mar 09. 2025

‘아름드리나무들은 베어져 어디로 갔을까?’

산속의 큰 소나무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휑하게 남은 건 군데군데 드러난 그루터기이다. 따스한 햇볕을 따라 오랜만에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이어져 있는 작은 동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계절 푸르른 그곳은 오래된 소나무와 아카시아, 산벚꽃, 상수리나무, 도토리나무, 산딸기나무 등이 둘러싸고 있어 늘 푸근하다. 봄이면 직박구리가 삐이익 삐, 참새가 짹짹, 까치와 까마귀가 짝을 찾는지 소란스럽게 우짖는다.      


작은 동산은 여름에는 싱그러운 녹음으로 산림욕을 하는 듯 상쾌하고, 나무가 내어주는 그늘은 시원한 쉼터가 되어 준다. 가을에는 꽃보다 예쁜 단풍 물결이 눈을 호강시키고, 겨울에는 나무마다 소복이 쌓인 눈이 축복을 내린 듯 설경이 장관이다.     


산을 한 바퀴를 도는 데 20분이 걸리지 않는 작은 동산이지만,  이곳은 동네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너그러운 자연의 품이다. 보통 5~6바퀴를 천천히 음악을 들으며 힐링의 시간을 보낸다. 산책을 마치고 바로 옆 공원으로 내려가 운동 기구로 마무리하는 것이 나의 루틴이다.      


나무 밑의 양지바른 곳에는 파릇한 새싹들이 앙증맞게 고개를 내밀고, 보랏빛 꽃망울이 수줍게 눈인사를 건넨다. 겨울의 눈보라와 매서운 바람을 이겨내고 맞이하는 찬란한 봄날, 그 빛깔은 더욱 눈부시다. 어쩌다 마주치는 동네 어르신은 이 작은 동산이 있어 얼마나 살기 좋은지 우리 동네는 복 받았다며 동산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신다.


아름드리 소나무며 참나무를 두 팔 벌려 안아주고 "건강하게 자리 지켜주어 고마워,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것이 어르신의 운동 마무리다. 나무도 사람도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아챌 때 더 푸르게 선명하고 예쁘게 자라는 법이다.     


지난겨울 유난히도 폭설이 많이 내렸다. 여름철 모진 태풍에도 끄떡없던 아름드리나무들이, 곧고 고집스러운 철갑을 두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쌓이면서 부러졌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가볍고 하얀 눈에 아름드리나무가 꺾이고 마는 것이다. 정정한 나무들이 솜털처럼 부드러운 것 앞에서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뒷동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일어난 얼굴처럼 초췌하다.      


커다랗고 곧은 나무들이 쩍쩍 부러져 보기 흉하고 안전에도 위험하여 관계기관에서 며칠째 소나무를 정리한 것이다. 여기저기 굵은 밑동들만 덩그러니 남은 모습을 보니 마음 한편이 허허롭다. 옆으로 한눈팔지 않고 곧게 크느라 애쓴 나무들, 그, 곧은 허리가 베어졌다. 얼마나 아팠을까? 나이테 사이로 스며 나온 송진이 마치 눈물 자국처럼 보인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라는 속담이 떠올랐다. 반듯하고 멋진 나무들이 사락사락 내리는 눈 무게에 꺾여 잘려 나가고 남은 것은 작고 휘어진 가지와 그루터기이다. 사람도 나무와 같아서, 눈에 띄게 잘나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있는 듯 없는 듯 부지런하고 조용하게 사는 것이 최선이고 쉬운 일 같지만 어렵다. 결국 본인을 내세우기보다 칡넝쿨처럼 더불어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을 나무들은 말없이 일러준다.     


차갑고 어두운 땅속을 밀어내고 묵묵히 새싹을 틔운 이름 모를 풀들이 고맙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와 다르지 않다. 때로는 눈에 띄지 않는 하루들이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된다. 세상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다 보면, 나무처럼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된다.     


문득, 저 그루터기들이 말없이 전하는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잘려 나간 것들이 남긴 자리에 피어나는 새싹들. 잃은 만큼 다시 채워지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듯, 우리도 그렇게 비우고 다시 채워지기를. 그루터기마저도 봄을 맞이하는 인사를 건넨다. "괜찮다. 다시 피어나면 된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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