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생일
여름날 빗소리처럼 조용히 끓는 냄비에서 고기 삶는 냄새가 퍼지자, 오래된 시간이 주방 한구석으로 잔잔하게 스며들었다. 내가 30~40대 때에는 아기 백일이며 돌상도 집에서 차렸고, 가족의 생일 역시 집 안에서 준비하곤 했다. 온 가족이 모여 북적이며 음식을 만들고, 함께 웃고 떠들며 하루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삶의 속도가 빨라지고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집에서 차리는 생일상’은 점점 사라져 간다. 이제 가족 행사도 대개는 좋은 식당에 예약을 하고 치른다. 바쁘니까, 간편하니까, 어쩌면 그것이 더 세련된 방식이라 믿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올해 생일을 맞은 남동생만큼은, 집에서 내 손으로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었다. 환갑을 넘긴 동생을 위해, 주방에 선 나는 손과 발이 분주하다. 종이에 요리의 순서를 적어놓고 하나씩 만들어 가면서 마음은 흐뭇하다.
불고기와 잡채, 소고기미역국, 동그랑땡, 고추전, 호박전, 큼직한 굴비까지… 정성스레 차리다 보니 어느새 식탁은 풍성해졌다. 동생은 어릴 적부터 유독 내게 각별했다. 바로 아래 동생이라 그런지 형제들 중에서도 정을 많이 나누었다. 20대, 서울의 좁은 방 한 칸에서 함께 자취하던 시절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직장에 다니고, 동생은 대학에 다녔다. 엄마가 보내준 반찬으로 어설프게 아침상을 차리고, 나란히 밥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하던 날들. 서로에게 의지하며, 낯선 서울살이를 견디게 해 준 단단한 버팀목이었다.
이후 결혼과 각자의 삶으로 바쁘게 살아가고, 그는 묵묵히 35년을 공직에서 보냈다. 지난해 정년을 맞은 후에도 기타를 배우고, 모임을 만들고, 바쁜 일상을 보낸다고 했다. 천성이 부지런한 그는 지난 8월에는 재취업까지 하며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삶 그 자체로 빛나는 등불 같다.
그런 그가 오늘 내 앞에 앉아 “엄마 손맛 같다”며 음식이 간이 잘 맞고 맛있다며 만족해한다. 식습관이 닮은 가족이라는 따뜻한 위로와 고마움을 표시한다. 동생의 모습에서 인자한 눈매로 바라보던 엄마의 얼굴, 거칠고 주름진 손으로 내 손을 감싸주시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생일상을 마주하고 앉으니, 자연스레 고향집의 뒷산 대나무 숲과 풍경이 아련하게 보인다. 부엌에서 두부를 만들고 김치전을 부치던 엄마, 집 안 가득 퍼지던 구수한 밥 냄새, 장독대에서 퍼올린 장맛의 깊은 향, 굵은소금을 뿌려 석쇠에 지글지글 돼지고기 굽던 소리…. 그 모든 기억이 시간의 틈을 뚫고 되살아났다.
넉넉지 않던 시절에도 뭐든 잘 먹는 6남매의 밥상만큼은 늘 정성스럽게 차리셨다. 고기는 귀했지만, 직접 농사지은 텃밭의 재료로 만든 음식들은 우리의 배를 든든히 채웠다. 고소한 콩전, 단단한 손두부, 소박하지만 정직한 그 맛 덕분에 우리 형제. 자매들은 모두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었다.
생일날이면 “미역국을 먹어야 인복이 있다”라는 엄마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오늘 동생을 위해 준비한 완도산 산모 미역과 치마양지로 끓인 미역국에는 엄마의 마음을 담았다. 동생의 미소 속엔 분명, 그 시절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식사를 마친 후 함께 집 근처 공원을 걸었다. 흰머리는 늘고 배는 볼록해졌지만, 동생의 웃음은 여전히 어린 시절 그대로 귀여운 모습이 있다. 세월은 외모를 바꾸었지만, 남매의 정은 오히려 더 단단해진 듯하다. 건강관리에 필요한 이야기, 재테크, 조카들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기분 좋게 한참을 걸었다. 동생도 나도 머리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녹록지 않은 인생살이를 잘 버티며 지금껏 살아온 모습이 대견하고 고맙다.
오래전 부모님은 하늘의 별이 되셨지만, 따뜻한 사랑은 여전히 우리의 식탁 위에 놓여 있다. 부엌에 울려 퍼지던 엄마의 웃음소리, 장터를 오가시던 산처럼 커 보이던 아버지의 어깨, 짐 자전거를 끌던 큰오빠의 뒷모습까지—모든 장면은 세월에 씻기지 않고 내 마음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 모두 늙어간다. 그러나 우리가 따뜻한 사랑과 정을 나누고 추억을 이야기하는 한, 가족의 서사는 끝나지 않는다. 좋은 기억은 늙지 않고 늘 우리 안에서, 젊고 따뜻하게 살아 있다.
[소고기 미역국]
(재료)
치마양지 600g, 미역 20g, 조선간장 2스푼, 참치액젓 1스푼, 다진 마늘, 소금, 후추 톡톡
(만들기)
1. 핏물을 제거한 양지고기와 통후추, 양파 반 개를 큰 냄비에 물을 충분히 넣고 뚜껑을 열고 센 불에서 끓인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뚜껑을 덮고 중간불로 1시간 이상 푹 끓여준다.
2. 마른미역은 찬물에 10~20분 정도 불려 깨끗이 씻어준 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3. 통후추와 양파, 잘 익은 고기는 건져놓고 맑은 고기육수에 미역을 넣고 20분 정도 끓여준다.
3. 국간장, 액젓, 소금 등으로 간을 맞춘다.
4. 푹 익힌 고기는 결대로 찢어 조선간장, 마늘, 다진 파, 후추를 넣고 조물조물 무쳐준다.
6. 국물이 진하고 미역이 부드러워지면 국그릇에 담고 고기를 듬뿍 올리면 완성이다.
* 치마양지 미역국은 한우 치마양지살을 사용해 부드럽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으로 으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