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솥뚜껑
얼큰 두부조림
가을바람이 불면, 언제부터인가 시골집 곳간에 쌓인 마른 콩 냄새가 떠오른다. 선선한 바람 속에서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을 건너뛰며 지나온 시간이 문득 스쳐간다. 고향 집 마당에서 불던 바람, 그 바람이 불면 자연스레 콩을 연상하게 된다. 마치 시간이 거기에서 멈춘 것처럼, 여전히 그때 그 자리에 있는 듯하다.
부엌 왼쪽에 놓인 나무로 된 광 문이 열리면, 입구가 쩍 벌어진 커다란 자루가 보인다. 그 속에는 하얗고 동글동글한 마른 콩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어린 나는 그곳을 보고 마치 콩의 무덤 같기도 하고, 작은 보석들이 숨겨진 보물창고 같기도 했다. 고향에서 먹을 수 있던 것들은 그 곳간에 있던 재료들로 주로 만들어졌고, 그 음식들은 집안을 가득 채우던 따뜻한 온기처럼 내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
어린 시절, 엄마가 두부를 만들 때면 부엌은 그야말로 분주해졌다. 맷돌에 불린 콩을 돌려가며 고운 콩물을 만들고, 그 물을 하얀 면 주머니에 짜면 콩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을 나는 구경하면서 두 팔 걷어붙이고 물 바가지를 가져다주고 곧잘 잔 심부름하곤 했다. 네모난 틀에 몽글몽글한 순두부 물을 부어 누름돌을 누르고 기다리면 두부가 단단하게 뭉쳐져 있다. 그건 온 가족의 간식이자 밥상 위의 선물이 되었다. 담백하고 고소한 손두부를 양념간장에 찍어 먹으면, 그 맛은 기억 속에서 여전히 선명하다. 그 시절의 밥상은 언제나 소박했지만, 엄마의 정성과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형제들이 자라면서 입맛도 달라졌다. 담백한 두부보다는 자극적인 맛이 더 좋아졌다. 그때부터 엄마의 하얀 두부는 변신하기 시작했다. 까만 솥뚜껑에 돼지비계와 들기름을 두르고, 그 위에 노릇노릇하게 구운 두부를 얹어 매콤한 양념을 더 했다. 그렇게 두부는 밥 위에서 덮밥이 되었고, 얼큰한 국물과 함께 한 숟갈 떠먹으면,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에 하얀 밥 한 공기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했다. 엄마의 손끝에서 나오는 특별한, 고향의 맛이었다.
그리고 두부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가끔 황태도 넣어 함께 졸였다. 그 황태와 두부는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 않는 맛을 주었다. 늘 똑같은 두부였지만, 언제나 다른 재료와 모양으로 변했다. 그 맛 속에는 그때 그 시절의 시간이, 엄마의 마음이, 그리고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두부는 그저 평범한 음식 재료였다. 하지만 그 속에는 엄마의 따뜻한 마음이, 오랜 세월의 지혜가 깃들어 있었다. 손수 만든 두부는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고향과 가정, 가족의 정을 맛보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엄마의 두부조림을 만든다. 들기름과 올리브유를 섞어 두부를 구운 뒤, 고춧가루와 간장, 마늘, 청양고추를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그 국물이 자작하게 졸여지면, 부엌 가득 엄마의 손맛이 묻어나는 것 같다.
그리고 딸아이가 이렇게 말한다. “엄마, 하얀 두부보다 양념이 더 깊게 배고 칼칼하면서 고소해요. 이번에도 할머니 손맛 재현은 성공이야!”라고 엄지 척을 올려준다. 어린 시절의 이런저런 추억을 나누며, 두부조림 하나에도 고향의 계절, 가족의 말투, 엄마의 손끝에서 나왔던 그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두부는 맛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좋은 식품이다. 고단백 식품으로 면역력 강화에도 좋고, 성장기 아이들에게 중요한 영양소가 된다. 엄마가 두부를 많이 만들어 주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 속엔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고, 음식은 우리를 키우고 지켜주는 소중한 존재였다.
오늘 그 시절을 돌아보며, 가을바람 속에서 기억을 더듬는다. 매콤하고 고소한 두부조림을 밥 위에 올려 쓱쓱 비벼 한 숟갈 떠먹을 때, 그때의 풍경과 그 시절의 맛이, 그리고 엄마의 정성이 나를 감싼다. 그렇게 나는, 그 음식 속에 담긴 사랑을 되새기며 오늘도 살아간다.
[두부조림]
(재료)
부침용 두부 1모, 양파 반 개, 대파 흰 부분 반개, 다진 마늘 한 숟가락, 고춧가루 2스푼,
청양고추 2 개, 간장 3스푼, 맛술(또는 물), 올리고당 2스푼, 들기름, 참기름
(조리 방법)
1. 두부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종이행주로 물기를 제거하고, 소금을 뿌려 잠시 놓아준다.
2. 팬에 올리브유와 들기름을 반씩 섞어 넉넉하게 두르고 두부를 중간 불에 앞뒤로 노릇하게 부쳐준다.
3. 간장, 고춧가루, 다진 마늘, 올리고당, 청양고추, 홍고추, 맛술, 후추 톡톡, 참기름 등을 섞어 양념장을 만든다.
4. 바닥이 두꺼운 냄비에 채를 친 양파를 깔고 노릇하게 부친 두부를 올리고 양념장을 고루 얹어준다. 타지 않게 물 반 컵을 냄비 바닥에 살짝 부어 중간 불에서 국물이 자작하도록 졸여준다.
5. 끓이는 동안 양념이 잘 배도록 숟가락으로 국물을 골고루 끼얹어준다.
6. 마지막에 참기름과 통깨를 뿌려 마무리하면 얼큰하고 고소한 두부조림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