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할 결심
4,5월 호 릿터의 커버스토리는 '게임할 결심'이다. 처음에는 게임할 결심을 계엄할 결심으로 보아서 무슨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나 했는데 다행히 내가 잘못 보았다. 원래도 릿터는 꾸준히 사서 읽지만 이번 호는 8비트 일러스트로 꾸며진 표지도 예쁘고 커버스토리도 특히나 흥미가 가서 설레는 마음으로 사서 읽었다. 주로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집에 가기 때문에 집에 가면 바로 받아 볼 수 있게 주문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도착하자 귀엽고 두꺼운 이번 호 릿터가 날 반겨주었다. 이번 호 릿터는 장편소설이 함께 들어 있어서 평소보다 더 뚱뚱했고 내가 과연 장편소설을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난 잘 읽어냈다.
50호부터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고 51호와 52호의 주제가 각각 '회복하는 문학'과 '타이완 문학이 뜬다'여서 다른 사람이 쓴 커버스토리라지만 내용이 조금 비슷비슷한 면이 있었는데 이번 호는 내용이 다 달라서 읽는 재미가 더 있었다. 나는 원래 게임을 잘 안 하고 게임을 시작해도 대략 2-3주 정도만 플레이를 하다가 점점 흥미를 잃고 그만두는 플레이어여서 게임이라는 장르에 왜 이리 몰입하고 열광하는지 잘 공감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 커버스토리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게임 플레이의 경험이 문학을 읽는 것의 경험과 굉장히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 해 주고 체험하고 몰입하게 되는 경험이 자주 언급되는데 생각해 보면 우리가 책을 읽으면서 상상하고 경험하는 것을 보고 듣는 형태로 실현시켜 주는 것이 게임 플레이의 목적 중 하나인 것이다. 물론 요새는 시간을 죽이고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본질적으로 게임은 또 다른 세계의 체험에 있다는 것을 이번 릿터를 통해 알게 되었다.
게임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니 게임 시나리오 작성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결국 경험제공이 목적이라면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게임의 시나리오를 어떻게 작성하고 그 안에 커뮤니티를 어떻게 구성하는지가 중요하겠구나 생각을 했다. 마침 내가 지금 다니는 학교에 게임학과가 있고 아는 언니가 게임학과를 다니기 때문에 나중에 시간이 난다면 그 언니에게 릿터를 쥐어주고 게임 시나리오 작성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해 보고 싶어졌다. 현재 게임 시장이 작가주의 게임이 나오기 쉬운 구조는 아니지만 게임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게임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실사나 애니메이션 영화도 많이 나오는 추세여서 이런 대화는 의미 있을 것 같다.
나는 게임을 전공하지는 않지만 게임 시나리오를 만들었던 경험은 있다. 편입하기 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한 게임 시나리오를 만드는 일종의 실습을 한 적이 있었다. 타겟층, 장르, 스토리 등을 설정해서 인공지능에게 만들어 달라고 하는 활동이었는데 나는 꽤나 칭찬을 받았었다. 20대 여성이 쉬는 시간에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꽃집을 운영하는 게임 시나리오를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6개 정도의 스토리를 만들어 주었고 보상과 페널티를 설정하게 했다. 대단한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꽤나 있음 직한 게임 시나리오가 나왔는데 릿터를 읽으면서 이때의 경험을 생각해 보니 그때 내가 게임도 문학처럼 경험성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더 좋은 프롬프트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릿터에는 가끔 곧 출간될 민음사의 소설이 실리기도 하는데 이번에 실린 장편소설은 '여름철 대삼각형'이라는 장편소설이었다. 사실 갑자기 나타나는 긴 글은 괜스레 무서워서 읽기에 부담이 되는데 그냥 눈 딱 감고 시작해 보았더니 굉장히 술술 읽혔고 흥미로웠다. 세명의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세 여성이 느끼는 감정과 과거 그리고 상황에 굉장히 몰입했다. 특히나 송기주라는 인물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나는 그녀의 사랑에 대한 묘사에 굉장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사랑은 노력하는 것이고 미움은 자연발생 한다는 맥락의 문장이 있는데 되게 뭔가 마음에 꽂혔다. 그리고 그녀가 그녀의 딸에게 느끼는 애매하고 오묘한 감정에 대해서 굉장히 빠져들었는데 내가 열등감이라고 생각한 것이 알고 보니 자각하지 못하는 사랑이고 그랬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해석했다. 작품 내내 등장하는 악몽 모티프가 있는데 나는 이 악몽 모티프가 각자에게 작용하는 의미는 알겠지만 작품 전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는데 이건 소설을 다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릿터에는 일부만 실려 있기 때문에 아직 다 읽지 못했다. 나는 또 이렇게 마케팅에 걸려들었다... 그런데 정말 이 소설에서 인상 깊은 부분이 많아서 읽는 내내 많이 밑줄을 치면서 읽었다.
시와 리뷰는 평범했고 인터뷰에서 요리사를 인터뷰한 게 흥미로웠다. 흑백요리사에서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은 분은 아니었지만 출연하신 분이라고 하고 요리사와 책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이야기를 들어보는 맛이 있었다.
산문에서는 항상 그렇듯 에밀리 디킨슨의 시 해석이 있었고 갯가재 산문이 있었는데 나는 이분과 감성이 잘 맞는 듯하다. 무언가 웃기려고 작정하지 않았지만 빵빵 터뜨려주고 뭔가 읽고 있으면 나랑 글이 비슷해 보인다. 혼자만의 착각 일수는 있겠다만 나는 이분의 글쓰기가 재미있어서 좋다. 산문을 좋아하는데 지금은 두 개밖에 나오지 않아서 약간 아쉽다.
단편소설 사과와 링고는 두 자매 사이에서 돈을 두고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동생인 사야가 굉장히 철없고 한심 하게 느껴지다가도 나도 남들이 보기에 저럴까라는 생각을 했다. 나도 동생이고 막내인지라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도 알게 모르게 철없는 행동을 하고 있을까 봐 두려워하곤 한다. 물론 사야는 누가 봐도 철없고 사리분별 못하는 행동을 하고 있지만 읽는 내내 남들이 보기엔 나도 똑같은 동생일까 봐 두려워졌다. 그렇다고 마지막 사라의 행동이 정당 한 건 아니지만.. 스포일러를 안 하려다 보니 맥락을 다 잘라먹은 글이 되었지만 읽어보면 이해하게 될 거다.
지난번 릿터 리뷰에서 까먹고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번 릿터를 읽으면서도 포함되는 이야기라 약간의 TMI를 적어보려 한다. 요새 나는 샤프나 볼펜 보다도 연필을 더 많이 쓰는데 지난번 릿터를 읽을 때에는 선물 받은 블랙윙 574 연필을 썼다. 굉장한 마니아는 아니지만 블랙윙 연필은 에디션마다 스토리가 있다고 하던데 574는 인디언 민족, 부족, 정체성을 담은 연필이라 타이완 소설과 약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 블랙윙 연필로 읽어 보았다. 그리고 이번 릿터는 블랙윙 연필과 비아르쿠 연필을 같이 써서 읽었다. 비아르쿠 연필은 연필에서 무화과 향이 난다고 하길래 신기해서 한 세트 구매해서 써 보았다. 지금은 향기가 다 날아갔지만 필기감이 마음에 들고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쓰니 정이 붙어서 손에 다 잡히지도 않는데 영혼까지 끌어다 쓰고 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연필에 대해서도 몇 글자 써 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