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 17이 나온 이 시점에서
내 기종을 밝히자면 아이폰 11이다.
이렇게 보니 6세대나 차이나는 꽤 구식임을 이제 좀 실감한다.
나에게 휴대폰은 갖고 싶은 물건이라기 보단, 갖고 있어야 하는 물건에 가깝기 때문에
그저 나라는 배우를 알리고, 영상과 사진을 촬영하고, 사람들과 연결되는 도구에 가깝다.
11이라 해도 사용하는데 전혀 지장은 없지만 딱 하나.
용량은 참 불편하다.
126GB.
수시로 나를 촬영하고 업데이트한 영상을 확보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126기가는 솔직히 버겁다.
그럼 아이클라우드를 사용하면 되지 않느냐?
맞지. 그래서 한동안 2 테라를 사용한 적이 있다.
한 2년 정도 사용했는데 한 달에 14,000원 정도 들어가는 금액이 너-무 아까웠다.
지난 촬영본들을 수시로 삭제하고 비워주면 충분히 들어갈 공간이 남을 텐데.
거의 세 달 동안 마음먹고 차근차근 사진들을 하드디스크에 백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00GB 이하로 겨우 만들고 나서 한 달에 4,400원을 지불하는 단계로 다운그레이드에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 순간이 돌아왔다.
카카오톡 사진은 보이지 않기 시작하고,
카메라를 켜면 용량을 비우라는 경고장이 뜨고,
네이버 길 찾기 (길치인 나에게 하루 중 가장 많이 들어가는 어플)에 저장한 즐겨찾기가 다 사라져 있는
불편하고 불쾌한 순간들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 비워야 하는데...
지우고... 폴더함 만들어서... 정리하고...
해야지... 해야지... 하면 되지... 하는데........
그렇게 한 둘째 나는 양동이에 넘쳐흐르는 물을 새로 비울 마음은 먹지 못하고
넘치기 직전 찰랑이는 표면의 물만 바가지로 한 번씩 퍼 버리며 버텼다.
비우고 싶다.
마음만큼은 정말 다 비워버리고만 싶다.
오래되어 들여다보지도 않는 사진들,
먼지만 쌓여 자리 잡고 있는 내 방 책장과 옷장 속 물건들,
참지 못하고 마구 먹어버린 내 위장 속 음식들,
이리저리 핑계 대고 회피해 버린 순간들,
그렇게 켜켜이 쌓여 딱딱히 굳은 죄책감들.
텅 비어있는 큰 동굴을 떠올려본다.
쌀 몇 톨 남지 않아 덩그러니 비어있는 쌀독을 떠올려본다.
사용가능 용량이 0/128GB 인 화면을 떠올려본다.
그 커다란 동굴을 나만의 아지트로 예쁘게 꾸미고 싶다.
마트에서 좋은 쌀을 사 와 쌀독을 든든히 채우고 싶다.
빈 앨범함을 정말 오래 보관할 것들로만 선별해서 차곡차곡 채워나가고 싶다.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다.
채움 위에 채움을 계속 곁들이다 보면 어느새 전부 빛을 잃을 수도 있다.
무언가를 덜어내려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지나간 것들에 대한 후회와 미련들, 스스로 느끼는 연민.
그 모든 걸 인정하고
그것들이 한때는 반짝였을 , 혹은 지금까지 반짝일지라도
앞으로 채울 더 반짝이는 것들을 들이기 위해 기꺼이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고.
휴대폰 오류로 순식간에 모든 사진과 영상이 날아가는 바람 비슷한 상상도 해본다.
' 아 어쩔 수 없네. 처음부터 다시 채워가야지. '
라는 마음이 충분히 든다는 건
지금 내가 스스로 비워내 볼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오늘 그 양동이를 뒤집어엎어버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