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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

초여름 저녁 7시쯤 더위가 살짝 남아있는 맑은 날의 하늘의 색이 아닐까?

by 해날

옅은 파란색을 난 '하늘색'이라고 불렀다. 아직도 가끔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실은 하늘의 색은 파란 계열의 모든 색상이 아닐까? 노을이 진 하늘색은 그 이상도 포함해야 한다. 백야의 하늘은 오렌지 색이던데...?! 오렌지와 하늘은 어쩌다가 색상을 부여받고 자유를 잃었을까? '살색'도 있다. 지금은 복숭아색이라고 부른다는 것 같다. 피부와 복숭아도 당연히 하나의 색으로 정의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건 일종의 세뇌다. 하지만, 색은 이름이 필요하고 오해를 받더라고 누군가는 이름을 만들어줘야 한다. 코드명으로 부르는 건 삭막한 것 같기도 하다.


10명 남짓한 1학년 아이들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 모두 같은 색으로 색칠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마치 사인을 주고받는 것처럼 모두 다른 이의 종이를 슬쩍슬쩍 보더니 다들 같은 색으로 사과를 칠하고 또 다른 같은 색으로 알파벳 A를 칠했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아이들을 조종하는 것 같았다. 영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이 틀을 깨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한 명씩 다가가 직접 자신이 원하는 색을 고르게 했다. 아이들은 이제 나를 슬쩍슬쩍 보기 시작했다.


3개월쯤이 지났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칠하는데 같은 색상과 디자인은 하나도 없었다. 눈으로 덮인 건지 하늘색 선으로 그림자만 있는 트리, 무지개 빛으로 화려한 트리, 장식이 없는 그냥 녹색 트리, 불에 휩싸인 건지 빨간색으로 칠해진 트리 등등이 있었다. 이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구나 싶었다. 영어 알파벳이나 단어를 가르친 것보다 훨씬 뿌듯하고 보람찼다. 그 10가지의 다른 이야기들이 모두 살아있는 것 같았다. 색칠에 몰입하며 눈을 반짝이던 아이들이 자랑스러웠다. 색칠만 하던 영어클래스는 그 이후에 폐강되었다. 초보 선생이 아니었다면 영어 교육과 주체성 교육을 잘 합쳐서 더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했었을 텐데 모자란 난 그러지 못했다.


선택에 대한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주체성을 기르기 위한 첫 단계라고 생각한다. '틀린' 선택을 할까 봐 미리 차단하고 징검다리를 만들어 주는 것은 틀린 선택이다. 이 길은 오히려 방종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타협, 화해, 용서, 책임, 대화 등등의 다음 단계에서 올 수 있는 모든 것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강요하지 않고 선택하게 한다는 것은 존중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너의 의견을 존중하니 너도 나의 규칙을 존중해 줘.'의 메시지가 아닐까?


세상이 색상에 어떤 이름을 붙이던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에 다른 이름이 있다면 우리는 틀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 되면, 난 내 눈에 보이는 다양한 색에 나만의 이름을 만들어 줄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세상이 붙여놓은 이름이 낡은 사상이라고 화내지 않고 바로 볼 수 있게 되어 자기 주도적인 결정을 하기 되는 것이다.


"'하늘색'도 나쁘지 않아. 맑고 갠 하늘을 생각나게 하니 기분이 상쾌해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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