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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이들을 알아채주길 바라며

언젠가 당신들과 맛보고 싶은 맛

by 숨고


어딘가에서 묵묵히 당신을
기다리는 이들을 알아채주길 바라며


이곳에서 너무 종교적인 색채를 비추기는 그러하나,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활동의 영역 그 어딘가에서 방황하는 시기를 10년을 넘게 보냈다. 이곳저곳을 두루 돌아다니며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게 찾아온 빗줄기 하나가 있었다. 그 공간과 그 공동체에서의 생활이 참 편안하고 자유롭고 사랑을 주고받는 감정을 느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더라. 처음 누려보는 맛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숨 쉬는 시간을 맛보았으니 말이다. (그 전의 두루 다녔던 공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나의 상태, 나의 마음가짐 또한 준비된 터라 좋은 타이밍에 만난 공동체였던 것 같다)


그곳에서 맺은 인연의 세 사람이 있다.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정말 배울 게 많고, 씩씩한 친구, 우리가 바라보는 지향점에 대한 열심과 열정이 많은 친구가 하나 있다. 마냥 어리다고 보살필 대상이 아닌, 같이 가면 좋은 친구라는 마음이 드는 동글동글한 성품이 매력적인 친구이다. 또 다른 친구는 잠잠히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줄 아는 단단한 사람이며, 몇 살 터울 나지 않는 동생이자 둘만의 시간에서는 터울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언니 같은 친구이다. 또 한 친구는 세 살 위이지만 한참 언니 같기도 또래 친구 같기도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서로를 돕는 존재인 언니이다. 그 언니는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고, 함께한 시간에 반비례하게 많은 생각을 나눌 수 있었는데, 이 세 인연이 천천히 뜨거워져도 좋고, 급격히 뜨거워져도 유지한다면 좋다 싶은 그런 소중한 인연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 들은 나를 조용히, 무던히, 묵묵히 생각하고 기다리며 떨어져 있어도 궁금해해주는 인연들이었다. 나만 몰랐을 뿐. 우리가 혼자라고 생각하고 동굴로 들어가 저마다의 어둠의 시기를 보내는 와중에 우리는 뒤에서 조용히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려 주는 존재는 미처 모를 때가 있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런 시간을 맛보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혼자라 여겼던 자리에서 혼자가 아님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그건 누군가의 먼저 내미는 손, 그 용기로부터 비롯될 수도 있고 스스로 나와서 찾아가 손을 내밀었을 때 알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용기를 내야만 나를 기다려 주는 이들에게 달려가 안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용기 하나가 주는 선물이 꽤 큰 것 같아서 '주변인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사람이 되어준다는 것'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는 삼천포로 빠지곤 한다.




다시 돌아와, 언젠가 그들에게 같이 함께하자고 권하고 싶은 여행길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모님과 함께한 아빠와의 추억이 깃든 아빠 고향의 꼬막짬뽕 맛집을 들르는 식도락 여행길이다. (사실 세 친구 중 두 친구의 식성을 몰라 매운 게 괜찮을지 아직 모르나, 그래도 괜찮다면 함께 하자고 권하여 맛보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음식도 음식인데 나의 고향, 내가 어릴 때 살았던 곳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을 소개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내가 살았던 곳의 향기가 배어있는 곳을 누군가와 나눈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은 없을 만큼 아주 어릴 때 살던 고향이지만, 그래도 그리운 그곳을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 나의 뿌리 아빠의 학창 시절의 추억이 있는 곳을 데리고 가 소개한다는 것은, 그마만큼 그들이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소중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소극적인 나라서 '당신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친하게 지내요 우리.'라는 표현을 담백하게 전하지 못하는 미지근한 표현이 일상인 내가 있다. 따스함을 전하는 방법이 '추운데 감기 조심해. 오늘 하루도 수고했으니 푹 자.'라는 표현이 늘인 나이다. 이 것들은 어릴 때 연습한 결과물인데 타인은 모르는 나의 '표현은 담백하되 진솔하게 전하기'라는 큰 도전과제 중 하나를 표현하는 대목들이다.


이렇게 표현에 대해 고민하던 중 나다운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결론을 내려버린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한 친구가 보내준 글귀 하나에 생각이 깨어진 찰나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 내용은 사라졌지만 이곳에 한 칼럼을 인용하여 기록하자면 이러하다.


순수한 우리말인 ‘아름’은 옛말에서 ‘나’의 다른 말이었다. 아름답다는 것은 섞임 없이 순수한 ‘나다움’이다. 근데 요즘 아름다움을 나와 다른 것에서만 찾는다. 내가 살고 있는 환경과 다른 이색적인 풍경을 보아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의 세계만 동경하며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아름답다고 한다. 이국적인 것, 새로운 것,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 나와 다른 것,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아름답다고 생각하니 삶이 허무하고 일상이 불만족으로 가득하다. … 아름다워지는 것은 내가 나다워짐이다. 내가 나를 받아들일 때 자신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이 사람다울 때,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다울 때, 키 작은 사람은 작은 것 자체가 아름답다. 내가 다른 사람과 꼭 같아질 필요가 없다. 나 자신을 스스로 받아들이면 된다.」




아름답다는 말의 뜻은 나답다는 말이라고 하니, 오늘은 '꽃들과 같은 당신들의 인생, 빛나세요. 당신답게 아름답게 사랑스러운 모습 그대로, 자연스레 웃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그대들의 인생은 저마다 피어나듯 아름다운 삶이랍니다.'라며 거창한 듯 고유하게 살아가는 존재 모두에게 희망과 따뜻함 담뿍 담은 언어로 위안을 전하고 싶다.


사적인 사유로 멀리서 지내는데도 나를 생각해 주고 잊지 않아 주는 고마운 존재들이 있다는 건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나를 잊고 살았고 내가 잊혔으리라고 믿었는데 생각보다 오래도록 나를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존재들이 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보이기에 조용히 숨죽여 기다릴 뿐. 연락이 없다고 나를 잊은 게 아니더라. 그러니 혼자라는 생각에 우울에 잠겨 시간을 보내는 이가 있다면, 어딘가에서 '터널에서 나오길 묵묵히 기다리는 그대들의 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고 느껴주기를. 그래서 환한 터널 끝에서 나와 당신의 진짜 위로자를 마주하고 기쁘게 끌어안기를 바라고 바란다.




인용구 발췌 : [임동헌 칼럼] 나다움과 아름다움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본헤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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