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같이 점심이나 먹을까?"
어느 찬 바람 부는 가을날, 지민의 첫째 남동생이 뜻밖의 점심 약속을 제안했다. 동생과 밖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었던가? 지민은 평생 단 한 번도 동생과 단둘이 외식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래, 동생과 함께 밥을 한 번 먹는 것도 좋겠다. 어디가 좋을까? 깔끔하고 대중적인 곳이면 좋겠네, 지민은 생각했다.
동생과 두껍고 넓적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평일 점심을 먹으려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스테이크를 주메뉴로 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은 평일 점심에 할인도 많이 되어 동생과의 첫 점심을 먹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지민은 3개월 전 암 수술을 받은 터였다. 오랜 직장 생활 끝에 발견된 암이었다. 초기에 우연히 발견되어서 간단한 수술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가 더 문제였다. 호르몬이 뒤죽박죽 되어 밖에 한 시간도 나와 있기 힘들었다. 지민은 인생이 이렇게 고단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과 평일 점심을 함께할 수 있었던 것도 병가로 직장을 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나, 할 말이 있어."
스테이크를 반 정도 먹었을 때, 동생이 말을 꺼냈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나를 만나자고 했겠지. 지민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본래 말수가 적은 동생이 따로 만나자고 한 것은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일 거라고 짐작했다. 무슨 일이지? 지민은 약간 설레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별일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중요하고 큰일이 나에게는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누나, 누나 입양됐어. 누나 괜찮지? 어차피 누나는 우리 누나니까, 괜찮아. 달라지는 건 없잖아."
한국어인데, 이게 무슨 말이지? 지민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리가 멍해졌다. 마음속에서 '이게 무슨 말이지?'라는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머리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무표정한 얼굴에 하얗게 질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내가 입양인이라고? 내가 어렸을 때 입양이 되었다고? 지민을 둘러싼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내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고, 내 아빠가 내 아빠가 아니고, 내 동생이 내 동생이 아니고, 내 친척이 내 친척이 아니라고? 모두가 지금까지 나를 속였다고? 그럼 나는 누구라는 거지? 지민은 순식간에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들에 대해 아무런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지민이 누구인지, 지민을 정의하던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평생 찾아 헤매던 답을 찾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그랬었구나. 자신의 삶에서 이해가 되지 않던 것들의 아귀가 맞춰지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이해하기를 포기했던, 찾을 수 없었던 것들이 이거였구나! 지민은 이 모든 무게에 휩싸여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런 누나를 지켜보는 남동생은 당황스러웠다. '이게 그렇게 큰 일인가?'
몇 개월 전이었다.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등의 통증으로 시골에서 올라와 동네 병원에 갔다가 큰 병원으로 가라는 얘기를 들었다. 곧이어 아버지 몸 전신에 암이 퍼져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입원 후 아버지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다.
"혈액 수치가 나빠서 수혈을 해야 합니다."
의사가 수혈이 필요하다고 말한 후, 몇 분이 지나서 간호사가 빨간 혈액 봉지를 들고 들어왔다.
"***님, B형이시죠?"
"아닌데요, 저희 아버지는 A형이신데요."
영철은 대학병원이 이런 실수를 하나 싶어 순간 어이가 없었다. 큰일 날 뻔했다고 영철이 생각하고 있는 순간, 아버지의 조용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영철아, 아빠 B형이야."
아버지의 말에 영철은 어리둥절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어머니는 B형이고, 누나는 AB형이고, 나는 B형이고 내 동생도 B형인데, 아버지가 어떻게 A형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동안 아버지가 A형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버지는 영철에게 지민이 입양인임을 담담하게 알렸다. 그렇게 영철은 지민의 입양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영철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누나는 우리 누나이고, 나는 누나의 동생이다. 변할 게 있겠는가? 영철은 그 사실을 마음에 묻어 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