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 이 일차 .... 리셋 29시간 전
새벽 5시 갈증으로 잠에서 깬다.
우선 우물가에 가서 시원한 물 한 바가지를 떠서 벌컥벌컥 마신다.
머리가 개운해지는 느낌이 든다.
숨을 크게 한번 들어 마신 후 주위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란다.
<선유도 다....>
어제의 일이 신기루처럼 떠오르다가 사라진다.
<어떻게 된 거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중 늙은이인 내가 27살인 내 머릿속으로 들어간 것 같고 그리고 배에서.... 젊은 아내를 봤는데... 나는 말을 걸지 않아서 같이 동행하지를 않았다.> 는 것까지 생각이 났다.
그리고 48시간 후 리셋.....
잠이 확 달아났다.
큰일이다.
어제 젊은 아내에게 말을 걸고 여기로 데리고 왔어야 결혼을 하고 아들과 딸을 낳으며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나는 어제 망설였다.
이유는...
또다시 하는 마음이... 또는... 알고 있는 기억들이 나를 망설이게 하였다.
생각해 보자.... 리셋 28시간 전
아내와 살아오며 온갖 싸움의 밑거름이 되었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고 “망설임”과 같이 머릿속에 각인된 단어 “지겹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지겹다”라는 단어가 “망설임”앞에 꽈리를 틀고 앉아서 조정하고 있는 느낌이다.
"지겹다"는 나에게 어떤 느낌일까?
시간적인 것인가? 사람으로 인한 것인가?
나는 젊은 아내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아침도 자연스럽게 지혜네 팀이 합석하여 같이 밥을 먹었다.
우리 팀의 오늘 일정을 말해주니 지혜네 팀도 우리팀을 따라서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말을 한다.
오전에 망주봉을 한 번 더 오르뒤에 장자도로 넘어가서 점심 식사를 하고 대장봉을 등반한 후 하산하여 돌아 오는 일정이다.
망주봉 오르는 길.... 리 셋 25시간 전
망주봉 오르는 길은 정식 등산길이 나있지 않고 경사가 급한 매우 위험한 길이다.
우리는 평상시에 산을 자주 탔었고 어제도 올랐던 산이라 별 어려움 없이 오르는데 지혜네 팀은 거의 기다시피 오르고 있다.
힘이 드는지 아니면 무서움 때문인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지혜 씨를 보며 손을 내미니 냉큼 손을 잡고 따른다.
드디어 정상...
산 아래로 푸른 바다가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번들거리고 있다.
기념 촬영을 하며 슬쩍 지혜 씨의 어깨 위에 팔을 얹는다.
나를 잠깐 흘기듯 쳐다보지만 그리 싫지 않은 표정으로 그대로 사진을 찍는다.
순간 지혜 씨의 얼굴 위로 아내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또 다시 이유없이 가슴이 먹먹해진다.
오랜 시간 동안 접고 접어서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두툼한 그리움이 마음속으로 전해진다.
젊은 아내를 찾아야 되나? 하지만 아직도 “지겨움”이 “망설임”을 잡고 있다.
장자도 가는 길.... 리셋 22시간 전
선유도에서 장자도로 넘어가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
바닷바람이 다리 위를 걷는 우리 걸음을 위태롭게 한다.
지혜 씨는 내 팔을 잡으며 균형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힘든 망주봉 산행이 지혜 씨와의 관계를 한뺌 정도 가깝게 한 듯하다.
다리를 삼분의 일쯤 건넜을 때일까.. 건너편에서 세 명의 여자들이 마주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그중 한 여성... 젊은 아내다.
이목구비를 바로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의 거리인데 익숙함이 내 젊은 아내를 바로 알아보게 만든다.
내가 걸어가고 젊은 아내는 걸어온다.
나는 젊은 아내를 알아보는데 젊은 아내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서로 엇갈려 지나간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서러운 그리움이 느껴진다.
<젊은 아내를 불러야 하나... 나를 알게 해야 하나>
다시 망설인다.
<속박되고.. 속박시키고.. 기다리고.. 지치고.. 정신도 핍박해지고..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만 알고.. >
젊은 아내는 선유도로 가고 나는 장자도로 넘어간다.
장자도 선술집 .... 리셋 16시간 전
대장봉을 올라갔다 하산하여 장자도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신다.
수평선 위로 해가 점점 내려앉으며 파랗던 하늘이 연분홍색으로 변해간다.
색이 바랜 노르스름한 막걸리 잔을 들어서 한잔 마시고 잔을 놓는다.
그런데 눈물이 뚝... 떨어진다.
우리 동료들도 지혜 씨네 팀들도 왁자지껄 이야기가 오고 가는데...
<나는 주위가 적막하다.>는 느낌이 든다.
어설픈 유리문 너머로 해는 지고 있다.
이제 바다와 맞닿은 하늘은 붉은 핏빛이다.
눈물이 뚝... 뚝... 연이어 떨어진다.
그리움이... 외로움이..
주위 동료들과 어제 만난 지혜 씨 팀들은 시끌시끌 이야기를 나누고....
둥그런 상위에는 여러 군데가 찌그러진 막걸리 주전자와 해물파전, 낙지볶음이 지글지글 끓고 있다.
눈물이 뚝.. 뚝,, 떨어지는 그리움이.. 외로움이 나에게 왔다.
깨어진 유리에 어설프게 반창고를 붙인 가게 문을 드르륵 열고 밖으로 나간다.
조금 떨어진 해변가에서 주기적으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발길을 해변가의 봉긋 솟은 바위 쪽으로 옮기며 하늘을 보니 어느덧 어두움으로 가득 찼다.
숨을 깊이 들어 마시다가 “후-우” 하고 길게 내뱉는다.
“뭐해요?”
“.....”
언제 나왔는지 지혜 씨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다.
“아까 보니 술 한 잔 마시다 말고 눈물을 똑 떨어트리던데...”
“.....”
묻는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지혜 씨는 뾰루뚱한지
“흥.. 말하기 싫으면 들어갈게요"
하며 돌아선다.
“아.. 미안... 미안해요. 아까 해넘이를 보면서 감정이 파도 따라 일렁이더니 막걸리 한잔 마시니까 주책없이 눈물이 나왔나 봅니다.. 하하..”
“호호호... 생기신 것은 산적 두목같이 생겼는데 해넘이 보고 울컥하여 눈물도 흘리다니 상당히 감성적인가 봅니다. 오늘 망주봉하고 장군봉 오르 때 저를 많이 도와줘서 한잔 마시면 막걸리라도 한잔 따라 주려고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본 거예요”
“그렇군요”
“그런데 얼마나 감동을 받았길래 주먹만 한 눈물을 뚝뚝 흘리시는 거예요?”
“....”
“사나이 눈물을 봤으니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냉큼 따라 나와봤지요. 나는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라서.... ㅎ”
“지혜 씨 혹시 그리움 아세요?”
“그리움이요? 뭐.. 보고 싶은데 못 보는 그래서 마음이 미어지는 상태? 아닐까요? 왜요.. 누가 그리워서 우신 거예요?”
“보고 싶은데 못 보는 마음... 미어지는 상태라?”
“제가 듣기로는 여자 친구는 없다고 하던데... 아까 정선배 님이 나한테 잘해보라고 말까지 하던데요? 그래서 뭐... 잘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정말 그리움이 사무치는 대상이 있어요? 그럼 됐고요. 그리움에 사무쳐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좋아하는 대상이 있다면 잘해볼까 하는 말은 취소예요..취소.”
지혜 씨는 취소라는 말에 힘을 주며 내뱉더니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빤히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지금 기분으로는 구구절절한 변명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별다른 대꾸 없이 먼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뻘쭘해진 지혜 씨는 몸을 획 돌려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화가 난 상태로 가게로 들어간 지혜 씨를 보며 “참 불같은 성격의 아가씨 군..”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지혜 씨와 인연의 끈을 묶는다면....
나는 간혹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나 또는 생각할 것이 있을때는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필요로 하다.
아내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러한 면에 있어서 매우 편했다.
서로 의견 충돌이나 타협이 필요할 때 또는 나의 외적인 문제로 고민을 하여야 할 때 아내는 다그치는 일 없이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아내는 말하는 것도 잘 하지만 듣는 것을 매우 잘했다.
아직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지혜 씨의 경우는 생각을 별다른 필터링 없이 말하기를 좋아하고 자신이 물어보는 사항에 대해서는 즉시 대답해 주기를 원하는 것 같다.
나는 결혼 생활은 무엇보다도 싸움을 잘 해야 된다고 본다.
여기서 싸움을 잘해야 된다는 것은 물론 주먹이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싸움 기술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자라온 환경과 살아온 패턴, 지향하는 목표가 다른 남과 여가 만나서 한 울타리 안에서 살게 되면 티격태격하는 싸움은 반드시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싸움의 기술이라고 본다.
무조건 이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조건 지는 것도 아니며 상대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고 자신의 자존심도 지키는 싸움의 기술... 적당한 타협과 협상으로 아무리 큰 싸움을 한 뒤일지라도 하하.. 호호 웃음 짓게 하는 싸움의 기술을 터득한 싸움의 고수가 필요하다.
연애를 할 때는 싸움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기분 나쁘거나 서로 싸우면 “나갈 거야” 하고 각자의 집으로 가면 된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가봤자 집안이다.
이럴 때 싸움의 기술이 부족한 남과 여가 만나게 되면 굳게 닫힌 현관문 밖으로 고성이 세어 나가고 애써서 장만한 살림살이는 절단이 날 것이다.
결국... 서초동 법원 계단 위에서 서로 눈을 흘기며 저주를 퍼붓고 각자의 길로 갈 것이다.
나는 즉답을 원하는 사람과 싸움을 잘할 수 있을까?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 리셋 15시간 전
지혜 씨는 술이 거나하게 취했는지 어제오늘 본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큰소리를 지르며 술주정 비슷하게 말을 한다.
친구들이 그만 좀 마시라며 말리지만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애는 술만 먹으면 이 모양이야.. 지혜아... 쉬.. 조용 조용”
“내가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하고 싶은 것은 하고 내가 내 인생을 사는데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 안 그래?”
“미안해요.. 지혜가 지금 술 먹고 이래서 그렇지 지혜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친구예요. 그래서 아직 이른 나이인데도 자기가 벌어서 차린 가게도 가지고 있고 일로써는 성공한 친구거든요”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지혜 씨는 근성이 있고 실행력도 뛰어나며 목표를 설정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가는 성격의 소유자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기애가 강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며 자기중심적 사고가 무척 강하여 서로 엇갈린 의견 대립이 생기면 협상을 통한 타협은 시간적, 감정적 소모 행위로 간주하여 뒤돌아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심이 강하며 협상과 타협을 원치 않는 사람과 싸움을 잘할 수 있을까?
지혜 씨 친구들을 쳐다본다.
한 친구는 성격이 무척 조용하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입을 꾹-닫고 듣기만 한다.
얼굴 표정도 크게 변화가 없고 잘 웃지도 않아서 간혹 화가 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적당한 웃음, 적당한 말투, 적당한 몸짓.... 같이 있으면 하는 것 없이 힘이 든다는 느낌이다.
또 한 친구는 성격이 무척 활달하다.
젊은 아내와 비슷하게 잘 웃고 잘 떠들며 모든 사람들한테 칭찬과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의 느낌이지만 매사가 정리 정돈이 안된다.
이야기도 중구난방, 무슨 일을 하다가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면 하던 일은 밀쳐두고 이야기 삼매경에 빠진다.
나는 조용하고 절재된 자기표현을 하는 사람과 또는 매사의 일들이 정리 정돈이 안되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과 싸움을 잘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나는... 나는 이것저것을 잘도 따지는 까다로운 성격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혹시 내 마음속 평형 저울은 공평함이 없이 처음부터 내 쪽으로 너무 기울게 되어 있어서 누구와 만나던지 항상 내 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심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