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인 글의 조회수가 10,000회를 넘었다
금주 30일째. 루틴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날은 아니었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이틀간 리듬을 조정했다. 평소처럼 단조로운 하루였지만, 이틀간의 작은 변주가 일상에 미세한 균열을 남겼다. 겨우 이틀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몸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했던 리듬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하는 순간의 어색함이랄까.
그 어색함이 부담으로 번지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새벽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고, 창밖의 바람은 어제처럼 매서웠다. 오늘도 창문을 열지는 못했다.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명상을 마쳤다. 그리고 다시 익숙한 루틴 속으로. 작은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새로운 책을 펼치기 전, 설 연휴를 잠시 돌아보았다. 짧은 이틀. 하지만 소가족이 함께한 그 시간은 밀도 높게 채워졌다. 외식, 볼링, 게임, 세배, 영화. 그 순간들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기억들, 별다른 걱정 없이 오롯이 행복을 느꼈던 시간들. 그저 감사했다.
그리고 문득, 퇴사 후 맞이한 이번 명절이 이전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입금되지 않는 상여금, 도착하지 않는 선물세트와 상품권, 울리지 않는 직원들의 단체 카톡, 더 이상 보내지 않아도 되는 명절 인사. 무엇보다도, 의무적으로 따라야 했던 술자리에서 벗어난 자유. 언뜻 보면 아쉬울 수도 있는 것들인데, 내 마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곰곰이 돌아보니, 나는 그동안 물질적 풍요를 받는 대신 감정적 감사함을 희생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직원들과의 술자리를 위해 가족들의 외식 시간은 각자 따로였고, 업무상의 문자와 전화에 신경 쓰느라 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를 미뤘으며, 지인들과의 한 잔을 위해 가족과의 외식은 늘 같은 곳에서 형식적으로 해결하곤 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명목으로 나는 정작 가족의 희생을 당연시해왔던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이 미안함으로 밀려왔다. 그리고 불과 며칠 전까지도, 나는 '더 나은 미래'라는 이유로 또 다른 희생을 가족에게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 작은 두려움이 스며들었다. 나는 정말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다행인 것은, 적어도 지금의 나는 가족들에게 짜증과 불만을 쏟아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스스로를 돌아보며 조심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희생을 강요하는 삶’이 아니라, ‘희생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진정 원하는 성공적인 인생의 방향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 끝에 문득 ‘희생’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어 사전을 찾아보았다.
희생(犧牲): 단순한 포기를 넘어,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내어줌으로써 더 큰 목적을 이루거나, 타인을 위한 헌신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또한, 죽음이나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을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동안 ‘희생’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이라 여겼지만, 그 이면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었다. ‘더 큰 목적을 위해 내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희생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실천하는 이 작은 선택들이, 언젠가 더 크고 단단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나는 오늘도 목표를 향해 책을 펼쳤다.
오늘 선택한 책은 최진영작가의 소설<구의 증명> 오랫동안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를 유지하고 있는 소설이다. 최진영작가는 <어떤 태도>에서 감성적이면서도 따뜻한 문체를 경험했고, <해가 지는 곳으로>에서는 인간 내면의 진실을 마주하며 희망을 발견하려는 강한 생명력을 느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베스트셀러가 된 그녀의 작품은 내 필독서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 작품은 단순히 희망과 용기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끝까지 희망을 붙잡으려는 이들에게 냉혹한 현실이 어떻게 가차 없이 다가오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기대하는 구원의 손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짓밟아버리는 허망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담이 죽은 구의 시신을 집으로 데려와 먹는다."
이 설정을 읽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이나 앞 페이지를 다시 넘겨보며 혹시 꿈속의 상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작가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인지, 상징인지, 독자 스스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담은 왜 구의 시신을 먹는가?
책의 제목이 <구의 증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결국 ‘구의 증명’이란 구가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든 증명해야 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그는 담에게 돌아온다. 생전에는 용기 내지 못했던 사랑, 함께하면 불행할 것이 뻔했던 현실 속에서 끝내 다가가지 못했던 감정을, 그는 죽음으로써 증명한다.
그리고 담은 구를 삼킴으로써 그를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죽었지만, 그녀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그녀는 그를 씹고, 삼키고, 자신의 몸속에 머물게 함으로써 구의 증명에 대한 응답을 보낸다. 그들의 사랑이 단순한 기억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 속에서 영원히 남아 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얼마전 6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을 읽고 나서인지, 오전에 마지막 책장을 넘겼다. 다 읽고 난 후, 나는 어떤 명확한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구의 증명>을 온전히 이해하고 해석하기에는 나 스스로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 오히려 증명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자 의미 아닐까?
한 권의 책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완벽한 답을 내릴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 속에서 고민하고, 스스로의 감정과 사고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구의 증명>이 나에게 남긴 가장 큰 의미일 것이다.
페달을 밟으며 오늘 시청한 영상의 책 내용은 게리비숍의 <시작의 기술>이었다. 어제 업로드 되어서 재생 버튼을 누르고 페달을 밟았는데 얼마전 봤던 영상이었다. 아마도 설날 이후 새로운 목표를 다짐하는 이들을 위해 다시 업로드를 한 것 같았다.
“자기 스스로 에게 하는 자기 파멸적인 대화를 지금 당장 멈춰라”
하와이 대저택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얼마 전 읽었던 기타가와 야스시의 책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아주 오래된 가르침 속 여덟 번째 퍼즐의 현자, 워드 워스를 통해 배운 적이 있다. 문득 그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는 제법 오래전에 읽었던 책들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기억난다는 사실이 조금은 뿌듯했다. 단순히 넘겨버린 문장들이 아니라, 내 안에 남아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 어쩌면 꾸준히 책을 읽고, 사색하며, 기록하는 이 모든 습관들이 내 안에서 서서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생각에 흐뭇한 웃음이 입가를 맴돌았다.
운동을 마치고 막내의 점심을 챙긴 뒤, 소파에 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막내가 다가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휴 마지막 날을 친구들과 보내고 싶다며, 귀가 시간을 30분 늦춰달라는 요청이었다. 특별한 날, 특별한 이유라면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최근 약속을 어기는 일이 조금씩 눈에 띄었기에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고 허락했다.
스스로 잘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은 미성숙한 단계. 그렇기에 적절한 견제와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무겁지 않게, 하지만 가볍지도 않게. 세배돈 관리, 앞으로의 학업 계획, 친구들과의 금전 관계 같은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꺼냈다.
잔소리는 길어지면 역효과를 낳기 마련이다. 그래서 10분 이내로 끝냈다.
막내와의 대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확인하던 중, 브런치 스토리에서 알림이 도착했다. 연재 중인 글의 조회수가 10,000회를 넘었다는 알림. 얼마 전 5,000회를 넘었다는 소식도 얼떨떨했는데, 이제는 그 두 배라니.
"도대체 이게 사실인가?"
순간 어리둥절했다. 브런치 스토리라는 단어조차 아직 내게는 생소하고 낯선데, 그 공간에서 내 글이 10,000번이나 클릭되었다는 사실은 마치 낯선 거리에 홀로 서 있던 나를 광장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 숫자의 무게를 가늠해 보고 싶어, 나조차도 가물가물했던 내 글을 다시 꼼꼼히 읽어보았다. 솔직히,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고 느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클릭해서 글을 읽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사람은 제목만 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었을 수도 있다. 그 생각을 하니, 약간의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물론 조회수가 높은 글만 사람들이 읽는 것은 아니다. 내가 올린 글은 어느 누군가에게는 닿는다. 블로그의 하루 평균 방문자 100명, 브런치의 200명. 매일 꾸준히 내 글을 찾아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아닐까.
그런데 나는 잠시 조회수 10,000이라는 숫자에 도취되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조회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의 독자라도 내 글을 읽고 단 한 문장이라도 마음에 닿는 것. 그 본질을 잊을 뻔했다.
새해 둘째 날, 세배를 하지 않았는데도 선물을 받은 듯한 하루였다.
글을 쓰는 기쁨과, 누군가 읽어준다는 감사함. 그것이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