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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2월 3일 월요일의 문학

"조지오웰" 그는 80년 전 21세기를 경험하고 간 것은 아니었을까?

by 마부자

금주 34일째, 어제날짜로 아내가 1년이라는 시간을 잘 이겨내고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켜주는 모습을 보였으니 나도 1년간의 약속을 꼭 지키기 위해 아침 루틴을 약속대로 진행하고 책상에 앉아 어제 오전부터 읽기 시작했던 책을 펼쳤다.


월 최소 한 권의 세계문학 전집을 읽겠다고 다짐한 지도 벌써 네 번째 책이다. 처음 목표를 세울 때는 거창한 결심 같았지만, 이제는 한 달을 시작하는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가고 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총 450권이라고 하니, 한 달에 한 권을 읽는다면 1년에 12권, 40년을 채워야 전부 읽을 수 있다.


그런 계산을 하다 보니 이 여정은 단순한 독서 목표가 아니라, 평생을 걸쳐 배워야 할 인생의 숙제처럼 느껴졌다. 조급할 필요도, 조바심 낼 이유도 없었다. 문학을 읽는다는 건 결국 시간을 들여 천천히 나 자신을 알아가는 일이니까.


문제는 450권 중에서 무엇을 먼저 읽을 것인가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끝도 없이 펼쳐진 목록 앞에서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우선 첫 번째 기준을 정했다. 조금이라도 익숙한 작가부터 읽어보자. 학창 시절 국어책에서 스치듯 접했거나, 어딘가에서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작가들의 책을 골라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세 권을 읽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그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두 번째 기준은 더 단순했다. 책의 내용을 미리 알고 선택하지 말 것.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애초에 내가 세계문학이라 불리는 작품들의 내용을 잘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끄러웠다. 이름만 들어봤을 뿐, 그 속에 담긴 이야기나 의미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모르는 채로 시작하는 게 더 낫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번에 선택한 책은 조지 오웰의 1984. 이전에 읽었던 세 권의 책과 비교하면 세 배는 두꺼운 책이었다. 택배 상자를 열고 그 묵직한 두께를 마주했을 때 순간 움찔했지만, "기죽지 말 것"이라는 다짐을 다시 새겼다.


결국 중요한 건 책의 길이가 아니라,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느냐일 테니까. 그렇게 첫 장을 넘겼다. 이번 책은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문학이라는 긴 여행 속에서, 나는 또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이 책에 대해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긴 이야기는 어제 독서실에 후기로 작성했다. 일기에서는 내용보다는 내가 느낀 점을 위주로 적어 볼까 한다.


조지 오웰이 <1984>를 1946년에 발간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마치 미래를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책 속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80년 전에 했던 미래에 대한 공상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정확히 묘사했기 때문이다.


거리를 가득 채운 CCTV,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한 데이터 감시, 우리가 소비하는 콘텐츠와 정보까지 기록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상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정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1984>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핵심은 이런 감시들을 통한 권력의 본질이었다. 권력은 단순히 물리적 지배에서 끝나지 않는다. 권력은 사람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지배하려고 하는 권력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거의 독재 정권이 강제력을 동원해 억압했다면, 현대의 권력은 훨씬 더 정교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스스로 정보를 선택하고 판단한다고 믿지만, 알고 보면 끊임없는 감시 속에서 특정한 방향으로 여론이 형성되고, 사고방식이 조정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권력을 통해 자신들의 성향에 맞는 방송을 내보내는 언론들을 보며, 과연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각은 왜곡되지 않았는지 질문을 수없이 던지며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책 속의 주인공 윈스턴처럼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너무 무서운 순간이었다.


또한 인상 깊었던 요소 중 하나는 배신이라는 개념이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중요한 순간마다 배신은 빠지지 않는다. 배신은 단순한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생존 방식일지도 모른다. 자연선택의 원리를 따져보면, 결국 살아남은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를 밀어내며 적응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세상에서 정말 믿을 수 있는 존재란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지만, 이미 감시당하고 있으며,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984>는 단순한 배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배신을 통해 지배하는 시스템의 실체를 꿰뚫어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강렬하게 남은 질문은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 하는 것이었다. 감시와 통제가 없다고 믿지만,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더욱 정교한 방식으로 개인을 조종하고 있다. 우리의 정보는 기업과 국가에 의해 수집되고 있으며, 알고리즘은 우리의 취향을 분석하고 행동을 예측하며, 언론과 SNS는 특정한 방향으로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것이 정말 자유로운 선택일까? 조지 오웰이 <1984>를 통해 던진 경고는 단순한 과거의 예언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었다.


이 책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강력한 거울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감시당하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우리가 믿는 것은 진실인가, 아니면 조작된 것인가?

조지 오웰은 어쩌면 우리의 미래를 경험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은 지금의 현실과도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가 남긴 경고를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지켜야 할까? <1984>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반드시 읽고 고민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필독서라는 생각을 했다.


왜 세계문학이라고 말하는지 오늘도 커다란 깨달음을 얻으며 책장을 덮고 손을 얹어 생각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80년 전에 이 책을 썼다는 것이 정말 경이로움 그 자체라고 느낄 수 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정말 여느 소설보다 더 깊은 여운과 생각을 남기는 한 편의 작품과 함께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시간들이었다.


주말 운동을 쉬었더니 몸이 뻐근하다 못해 아픈 느낌이 들었다. 이번달부터 살짝 강도를 높여 주기로 했다. 팔굽혀 펴기에 이어 아령을 일부 추가했다. 어깨의 통증이 잠시 줄긴 했지만 아직은 무리할 단계는 아니므로 정말 맛만 보는 수준이 추가였다.


페달을 밝으며 오늘도 영상을 시청한다. 지난주 시청하다 중지한 “하와이 대저택” 보도섀퍼의<멘탈의 연금술>에 관련된 내용을 마무리했다.

“삶은 스스로 선택한 책임의 결과물이다.
그러니 책임을 두려워하지 마라!책임을 질 때 삶은 당신의 것이 된다.

”출처: 하와이 대저택

살면서 우리가 하는 수많은 질문들 중에 어쩌면 가장 선택하기 어려운 질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바로 “당신이 책임질꺼야?”하는 것이고, 대답하기 힘든 답변 또한 “내가 책임 질께!”라는 말 아닐까?


문득 책임에 관련된 내용을 생각하다 문득 읽었던 책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마크 맨슨의 <신경끄기의 기술>이란 책에서 이 “책임”에 대한 문장을 읽고 굉장히 큰 깨달음을 얻었던 기억이 났다. 당시 책에서 보았던 문장을 생각해보았다.

“명심하라! 외부의 환경이 어떠하건 간에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내 책임이다"
그러나 “내 책임이다”라는 말이 "내 잘못이다"라는 말은 아니란 것을

”마크맨스 - 신경끄기의 기술 중에서

어떤 일이 내 삶에서 일어났다면, 그 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고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었다면 그것이 내 잘못은 아니지만,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는 내 책임이라는 의미로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 상황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던 것 같다.


자전거의 강도를 한 단계 더 높였다. 마지막 3분, 이를 악물고 페달을 밟았다. 허벅지와 종아리가 팽팽하게 당겼고, 조금 과장하면 언제든 쥐가 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땀이 지난주보다 훨씬 많았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과정이 묘하게 짜릿했다. 극한의 지점에서 맞닥뜨리는 고통과 성취의 경계. 다리에 힘을 풀고 자전거에서 내려서는 순간, 기진맥진하면서도 어딘가 후련했다. 이게 운동이 주는 쾌감이겠지.


모든 루틴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다시 익숙한 일상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 저녁 준비를 마쳤다.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식사를 하며 하루의 조각들을 주고받는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작년 12월, 인천 본가까지 가서 어렵게 담가둔 김장김치를 처음 꺼내는 날이었으니까.


김치통을 여는 순간, 익은 냄새가 퍼졌다. 한 점 집어 입에 넣는 순간, 나도, 아내도, 막내도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물론, 우리 입맛에 맞춰 담근 것이니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그래도 예상보다 훨씬 맛있었다. 사실 김장을 할 때 변수가 많았다.


우리 집 김치의 필수 재료인 꼴뚜기를 넣기 위해 연안부두까지 갔지만, 당시 꼴뚜기 가격이 너무 올라 결국 포기해야 했고, 배추도 직접 재배한 것이 아닌 절인 배추를 사서 담갔다. 그런데도 이 정도의 맛이라니. 손이 가는 대로 김치를 찢어 한입 더 베어 물었다.


“이 김치에 보쌈고기 먹으면 좋겠는데, 이번 주말에 먹을까?”


내가 슬쩍 말을 꺼내자마자, 아내와 막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마치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놓은 대답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오늘 저녁에는 보쌈고기가 없었지만, 김치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재난 문자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 내일부터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고 강한 바람이 불 거라는 예보였다. 생각해보니 오늘이 입춘이었다. 봄이 온다는 입춘 그런데 내일부터 날씨는 입동을 방불케하는 추위가 몰려온다고 한다.


그러나 이 추위가 지나가면, 가장 먼저 목련이 하얀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진달래와 개나리가 붉고 노란 옷을 입고,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거리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렇게 봄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늦게, 그러나 정확한 순간에 찾아온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매서운 추위는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제 곧 너에게도 봄이 올 거야.” 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기대 섞인 바람을 걸어본다. 지금 창문을 두드리는 이 차가운 바람이 올해 마지막 꽃샘추위이기를, 그리고 그 끝에서 따뜻한 계절이 기다리고 있기를.


그런 영향인지, 지금 일기를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창밖에서 태풍급의 바람이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다. 바람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따뜻한 식탁이 있었던 오늘, 충분히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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