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역사를 써서 어떤 역사를 남겨야 할까?
금주 32일째, 문득 숫자를 떠올려보았다. 처음엔 하루, 이틀씩 세던 금주의 시간이 이제 한 달을 넘겼다. 그리고 66일째가 되는 날을 향해 다시 의지를 다졌다. 금주가 습관이 되는 그 순간까지, 내 몸과 마음을 더 단단하게 다잡기로. 그렇게 오늘도 몸을 일으켜 루틴을 완성했다.
2월의 첫날, 창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비 치고는 제법 많은 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차갑고 묵직한 빗방울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손안에 고이는 물기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동안 그 감각을 느꼈다.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 빗살무늬로 흩날리지 않았다. 빗소리를 배경으로 조용히 명상을 하려 했으나, 내 곁을 졸졸 따라다니던 후츄가 창가까지 따라오는 바람에 결국 창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그다음으로는 책. 어제 읽다 잠시 덮어두었던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빗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활자를 따라 내려갔다. 한 문장, 한 단락이 더 깊이 스며드는 날이었다.
어떤 책은 긴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시대를 지나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유시민 작가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그러한 책이었다. 초판이 출간된 지 37년이 지났고, 그동안 몇 번의 개정을 거쳐 2021년에 다시 새롭게 다듬어졌다. 시간이 지나도 꾸준히 사랑받는 책이라면, 거기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유시민 작가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특정한 이념이나 정책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독자들에게 역사를 단순한 신념 체계로 삼아 세상을 판단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역사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시대에 따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역사는 무엇인가?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기록한다. 그러나 인간은 역사를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전쟁과 폭력, 탐욕과 억압의 역사는 시대와 장소만 바뀔 뿐, 본질적으로 비슷한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를 배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역사가 인류에게 진정한 교훈이 되고 있는가?
책을 읽으며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유시민 작가는 왜 이 책의 제목을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고 지었을까? 단순히 기존의 역사 서술 방식을 뒤집어 보겠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역사를 거꾸로 읽어야만 보이는 진실이 있기 때문일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역사를 승자의 기록으로 받아들인다. 전쟁에서 이긴 국가,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 권력을 장악한 지도자들의 이야기가 역사의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전통적인 역사 해석이 놓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쟁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 착취당한 노동자들, 억압받던 식민지 국가들의 시선에서 역사를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단순히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만 바꾼다고 해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읽는다는 것은 기존의 해석에 의문을 던지고, 우리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어왔던 것들을 다시 검토하는 과정이 아닐까.
이 책이 출간된 지 4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같은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동에서 벌어지는 민족·종교 전쟁
미국이 시작하려는 ‘이민자와의 전쟁’
이 모든 사건들은 과거의 역사가 현재에 다시 쓰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20세기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도, 우리는 여전히 전쟁을 피하지 못했다. 경제적 위기 속에서 다시 국가 간의 경쟁이 격화되고 있으며, 강대국들은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국제 협력을 거부하고 있다.
이 책이 2021년에 다시 개정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저자가 역사를 거꾸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단순한 과거 회고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미래는 결국 과거의 반복일 것이다.
책을 덮고 난 후, 나는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단순히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을 다시금 깨 달았다. 그러나 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단순히 역사의 기록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록을 바탕으로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역사는 쓸모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유시민 작가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통해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고 말했다. 역사는 지금도 계속 쓰이고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행동 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역사가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역사를 써 내려가야 할까?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 책은 나에게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다. 나는 문득 두려워졌다. 우리는 여전히 거꾸로 가는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에서도 지금, ‘헌정사 최초’, ‘역사상 유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부끄러운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또 한 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남길 것인가?"
마지막 장을 덮고, 언제나처럼 손을 책 위에 얹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면 언제나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하나는, 내가 역사에 대해 너무 문외한이었다는 사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흥미롭다는 사실.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는 순간, 마치 잃어버린 조각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또 하나. 아는 역사인데도, 다시 읽고 나면 속이 답답해지는 감각. 마치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힌 듯 답답해진다.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왜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새기지 못할까.
오늘도 그 두 가지 감정을 눌러가며 책상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빗소리는 여전히 창밖을 적시고 있었다.
주말은 늘 그렇듯 무급 매니저로 일하는 날이다. 최저시급이 1만 원에 육박하는 시대에 무급 아르바이트라니. 고용노동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내가 잡혀갈 수도 있다. 하지만 신고는 할 수 없다. 나는 아직 아내 없이 살기엔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니까.
아내와 함께 간단한 카레로 아점을 먹고, 볼링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내의 친구이자 동호회 회원 한 명을 차에 태웠다. 도착해 보니, 이번 주말엔 볼링대회가 없어서 그런지 지난주보다 사람이 적어 한결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볼링장 한쪽에서 볼을 드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힘차고 열정이 넘친다. 그녀가 상반기 안에 반드시 우승하겠다고 했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이 사람은 언젠가 원하는 걸 결국 이루는 사람이니까.
스트라이크가 터지는 순간, 그녀가 환하게 웃는다.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주말마다 무급 매니저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볼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회원을 내려주며 아내가 말했다.
“내일 봐~”
이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내일도 매니저를 해야 한다는 뜻.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도 같은 시간, 이 자리에서 봐요~^^”
토요일 볼링을 마치고 돌아오면 매번 같은 고민을 한다. 애매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저녁을 먹기엔 너무 이르고, 간식을 먹기엔 너무 늦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먹지 않기엔 어딘가 허전한 시간. 그러다 결국, 언제나처럼 같은 대화가 시작되었다.
“우리 오늘 뭐 먹지?”
나는 평소 점심을 잘 먹지 않는 편인데, 오늘은 아내와 카레로 해결한 터라 저녁 생각이 없었다. 그냥 삶은 계란 두 개에 두유 하나면 충분했다. 하지만 아내와 막내의 저녁이 문제였다. 일단 막내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을 먹을 건지 물었다.
막내가 말했다.
“아빠, 저 내일 주민등록증 사진 찍어야 해서 오늘 긴급 다이어트 들어갑니다.”
나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사진 찍는데 다이어트를 왜 해?”
막내는 단호했다.
“한 번 찍으면 언제 다시 찍을지 모르는 주민등록증 사진인데, 얼굴살이 조금이라도 빠지게 나오려면 오늘 굶어야 합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 녀석아, 하루 굶는다고 효과가 있겠냐? 그래도 네가 하고 싶다면 알겠다~”
전화를 끊고 나서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하며 한참을 웃었다.
"역시 아직 막내는 애는 애구나."
그러다 문득, 내가 아내에게 농담처럼 물었다.
“우리도 주민등록증 사진 찍을 때 저런 고민을 했던가?”
아내가 생각하더니 말했다.
“주민등록증은 아니어도, 우리 여권 사진 찍을 땐 그랬던 것 같은데? 예쁘게 나와야 한다고 술도 좀 덜 마시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을 듣고 순간 뜨끔했다. 맞다. 나도 그랬다.
그랬으면서 처음 막내의 말을 듣고 말도 안 된다고 딱 잘라 생각했던 내가 조금 부끄러웠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막내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냥 저녁 챙겨 먹으라고 짜증내지 않았다는 것.
나는 그 점에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저녁 고민을 다시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뭐 먹지?”
막내의 저녁은 해결되었고, 이제 남은 건 아내의 저녁.
메뉴를 고르라고 하니, 아내는 늘 그렇듯 간단한 걸 찾았다.
순간 떠올랐다. 며칠 전에 사 둔 고구마.
“그거 삶아 줄까?”
아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구마 귀신이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고구마를 깨끗이 씻어 찌고, 올해 담근 김장김치를 처음 한 포기 꺼내 맛을 보았다.
역시나. 찐 고구마에 김치 한 조각.이 조합은 여느 근사한 저녁 한 끼보다 든든하고 완벽했다. 아침에 역사를 생각하며 마음으로 먹었던 고구마의 답답함을, 실제로 오늘 저녁 먹으며 느끼게 되다니 그러나 그 답답함은 우리의 오랜 전통음식 김치가 해결해 주고 있는 이 느낌이 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순간이었다.
처음엔 삶은 계란으로 저녁을 해결하려 했지만, 결국 나도 포기. 아내와 나란히 앉아 김치와 고구마를 먹으며 조용히 하루를 나눴다. 식사 후, 따뜻한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대단한 이야기가 오간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사소한 대화가 가장 따뜻한 순간이 된다는 걸 안다.
그리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2월의 첫날을 정리하며 일기를 쓴다.
비가 오던 아침부터, 볼링장, 막내의 다이어트 선언, 그리고 고구마와 김치까지.
소소하지만, 이 모든 순간이 나의 하루를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