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신의 존재를 묻는 다면 오늘 만큼은 단연코 "있다"고 말할것이다.
금주 33일째.
지금 내가 이 모든 루틴을 지키고 삶을 유지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나와 함께 하는 가족의 존재 덕분이다. 그중에서도 내 곁에서 묵묵히 나를 지켜봐주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아내가 제 2의 인생을 살게된 1년이 되는 날. 오늘 하루 만큼은 일상의 루틴보다 그날의 기억을 잠시 돌아보며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만약 누군가 내게 신의 존재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오늘만큼은 단연코 ‘있다’고 말할 것이다.
나와 우리 가족에게 신이 주신 선물 같은 날이니까.
오늘은 특별한 아침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날. 아마도 내 삶이 유지되는 한, 2월 2일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감정은 오늘 아침에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다. 2월 2일이 다가올수록 어딘가 모르게 가슴 깊이 차오르는 묘한 감정. 그것이 불안인지, 기대인지조차 알 수 없는 채로 나를 휘감았다. 아니, 어쩌면 나는 이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날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반면, 어떤 날들은 우리의 삶을 깊숙이 파고든다. 마치 각인되듯,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무늬처럼.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2024년 2월 2일 오전 11시 50분경.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 순간, 나는 알지 못했다.
이 전화가 내 삶을 뒤흔들 문을 열어젖힐 것이라는 걸.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낯설었다. 익숙한 이가 아닌, 처음 듣는 여자였다.
"혹시, ○○ 씨 남편 되시죠?"
떨리는 목소리. 불안과 조심스러움이 섞인 어조.
그녀가 누구인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심장이 묘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내의 직장 동료라는 그 사람은 배우자를 찾고 있었다.
그녀의 말투에는 분명한 다급함이 배어 있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날, 2월 2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내분이 지금 쓰러지셨습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보이스피싱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단호했다.
내가 어리둥절한 채 다시 물었을 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막 구급차에 실려 가고 있어요."
그리고 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또 다른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장마비이신 것 같습니다. 다행히 주변에서 응급조치를 잘해주셔서 심장은 뛰고 있는데... 아직 의식이 없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지금, 얼굴도 모르는 낯선 남성이 나에게 하고 있었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의료대란이 한창이던 때는 아니었지만, 의사들과의 정부의 갈등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구급대원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받아줄 병원을 찾아야 합니다."
그 말마저도 현실감이 없었다. 응급환자를 두고 병원을 찾아야 한다니.
당연히 병원이 환자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
"00병원으로 오시면 됩니다!"
짧고 단호한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채,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그 후, 내가 어떻게 병원에 도착했는지 솔직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차를 운전했는지, 택시를 탔는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조차 희미하다.
분명한 건, 내가 어느 순간 응급실 문 앞에 서 있었다는 것뿐이다.
의사를 기다리는 초조한 시간. 몇 분이었을까, 아니 몇 시간이었을까.
그 시간은 마치 끝없는 터널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아내를 처음 보았다.
아내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초점 없는 눈. 온몸이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숨을 쉬고 있었지만, 살아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 모습.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의사가 말했다.
"뇌출혈입니다. 지금 생명이 위독한 상태입니다."
그 한마디가 내 머리를 세차게 강타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긴급 수술 동의서를 작성해 주세요."
손이 떨렸다. 종이에 서명을 해야 하는데, 펜을 쥘 수가 없었다.
그 한 장의 서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이후의 시간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얼마나 많이 자책했는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악몽인지.
그날, 2월 2일은 그렇게 나를 집어삼켰다.
2025년 2월 2일 오전 11시 50분.
정확히 1년이 지난 지금, 기적처럼 그리고 거짓말처럼 아내는 내 앞에서 고구마를 먹고 있다.
어제 내가 쪄둔 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고는 너무나도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간식을 먹는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듯이.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게 정말 현실일까?
아직도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아내는 그날, 다시 태어났다.
그때 주변 사람들의 빠른 대처, 다행히 적절한 시점에 찾은 병원, 그리고 긴박한 순간 내린 결정들.
그 모든 것들이 맞물리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세 번의 수술 끝에 아내는 살아났다.
"사실상 죽었다가 돌아오신 거예요."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
만약 그날, 어느 하나라도 시간이 어긋났다면, 아내는 지금 내 앞에 없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내의 웃음이 얼마나 기적 같은지.
만약 아내가 직장에서 혼자 쓰러졌다면,
만약 주변 사람들이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 119 구급차가 직장 바로 옆에 있지 않아 3분 내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만약 받아줄 병원이 제때 정해지지 않았다면,
만약 담당 의사가 포기하고 수술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그 모든 상황 중 단 하나라도 맞물리지 않았다면,
지금 내 눈앞에서 천진난만하게 고구마를 먹는 저 여인은,
아마도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숨이 막힌다.
너무나도 아슬아슬했던 그날, 모든 조각이 기적처럼 맞아떨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나는 이 현실이 더욱더 기적처럼 느껴진다.
이 모든 기적을 경험한 나는 신의 존재를 믿기로 했다.
무언가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라는 그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는 누군가는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앞으로의 인생에서 절대로 의심하지 않으며 살기로 다짐했다.
아내는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고구마를 한입 더 베어 문다.
그 모습이 마치, ‘나 살아있어,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다시 한번 되뇐다.
정말 다행이라고.
너무나도, 다행이라고.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아내는 이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다시 직장에 복귀했고, 좋아하던 볼링을 치며 환하게 웃는다.
우리 곁에서, 예전처럼. 아니, 어쩌면 이전보다 더 빛나는 모습으로.
마치 북미에 서식하는 나무개구리처럼.
겨울이면 얼어붙어 죽은 듯이 보이다가도, 봄이 오면 다시 깨어나는 생명.
아내는 작년 2월에 죽었다가, 따뜻한 봄과 함께 내 곁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현실 속을 살아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1년이 지난 지금 아내가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억력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고,
무엇보다도 후유증 없이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사할 수밖에 없다.
매일 새벽, 루틴을 지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말없이 조용히 깊이 기도한다.
신에게 우주에게 그리고 모든 영혼들에게.
감사하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오전 루틴을 마치고 나오니, 아내는 간식을 먹고 있었다.
함께 마주 앉아 점심을 먹고, 볼링장에 간다며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는 모습.
“빨리 준비해, 늦겠어!”
나를 재촉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싱그럽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커피는 꼭 사가야지.”
그녀는 늘 하던 대로 커피를 챙겼고, 볼링장에 도착해서는 힘차게 공을 굴렸다.
오늘 하루, 이 모든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볼링장에 사람이 많아 기다리는 시간조차도 오늘은 지루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 듣고 곁에 있는 순간들이 소중했다.
볼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막내와 함께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와서 차를 준비해 소파에 있는 아내 곁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문득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아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글쎄, 내 생일까지는 며칠 남았고… 그냥 일요일이잖아?"
나는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쓰러진 지 정확히 1년 되는 날이야."
아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벌써 1년이나 됐어? 시간이 금방 갔네!"
나는 아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게, 벌써 1년이 지났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근데 사실… 당신이 쓰러졌다고 하니까 알지, 그날 일이 전혀 기억이 안 나."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기억할 필요 없어.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면 돼."
그러자 아내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내가 미안해서 그러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제일 힘들었던 건 당신이니까. 정말 고생 많았어. 그리고… 내가 더 고마워."
아내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래! 나도 고맙고… 너무 수고 많았어. 이제 건강하게 잘 지낼게. 사랑해."
나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감싸며 말했다.
"그래. 더 이상 아프지 말고, 우리 정말 건강하게, 세상에 감사하며 살자."
거실의 작은 조명이 따뜻하게 빛났다.
고구마를 맛있게 먹던 그 천진난만한 얼굴처럼, 아내의 표정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오늘이야말로, 다시 찾아온 기적의 하루였다.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기쁨의 눈물도, 슬픔의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아니 흘리지 않았다.
아내도, 나도 이제는 울지 않기로 했다.
하늘이 주신 제2의 삶을 울면서 보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우리는 이미 너무도 절망스럽고 힘든 시간을 이겨냈다.
그 시간을 지나왔기에, 이제는 웃으며 살아가기로 했다.
어쩌면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우리 둘의 이야기는,
이제 희망이라는 기회를 얻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반드시 해피엔딩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를 쓰는 작가도,
이 장면을 연출하는 감독도,
그리고 이 드라마의 주연도—
모두 나와 아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