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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2월 12일 수요일의 협상

인생은 끝 없는 협상의 연속이고 고로 삶은 곧 협상이다.

by 마부자

금주 43일째, 어젯밤, 침실에 들어가기 전 잠시 거실에서 아내가 보고 있던 손석희의 질문들을 함께 시청했다. 오래 본 것도 아니고, 그저 잠시 서서 5분 내외 지나가듯 몇 장면을 본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여운은 예상보다 깊었다. 꿈 속에서 조차 현실의 무게감이 나를 쫓아다녔다. 뚜렷하지 않은 장면들과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불쑥불쑥 나타났고, 나는 그 속에서 자꾸만 헤매며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내가 특별히 대단한 애국심이 있는 사람도 아닌데, 단지 TV 프로그램을 잠깐 봤을 뿐인데 이 정도로 흔들리다니. 내 안에 생각보다 예민한 부분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곰곰이 돌이켜보니 그보다 더 큰 원인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최근 잠들기 전 TV를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이건 나의 작은 습관과 리듬을 무너뜨린 사소한 균열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요즘 잠자리에 들기 전의 나의 루틴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어둑해진 방, 약간의 독서, 정리된 하루. 그 안에서 몸과 마음은 스스로 안정을 찾았고, 평온한 밤을 선물해 주었다.


그러니 이번 불면의 밤을 부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다. 어쩌면 내 몸이 점점 ‘좋은 루틴’에 적응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이런 작은 혼란도 결국 변화의 일환일 것이다. 여전히 피곤하긴 했지만, 그 피로마저도 조금은 긍정적인 의미로 느껴졌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때,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나는 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깨어나는 나의 새벽을 느꼈다. 익숙하지 않은 피로 속에서도 분명 나아가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밤새 대구에 또 눈이 내렸다. 올해 들어 두 번째 내리는 눈이었다. 대구에서 한 해에 이렇게 연달아 눈이 내리는 일이 도대체 언제였던가. 생각해보려 했지만 기억이 희미했다. 그만큼 드문 풍경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바람도 그리 강하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창문을 열고 조용히 서서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았다. 눈이 쌓인 풍경은 언제나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모든 소리를 잠재우고, 세상을 잠시 멈추게 하는 힘. 나는 그 고요 속에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흰 눈이 만든 풍경을 오래 바라보다가 문득 큰 숨을 쉬고 싶어졌다.

매서운 추위라기보다는, 적당히 차갑고 맑은 공기가 느껴졌다. 겨울 아침에 어울리는 기온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베란다에 앉아 명상하기 좋은 날씨다. 나는 방석을 들고 와서 바닥에 조심스럽게 두고 앉았다. 양손을 배꼽 아래에 얹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차가운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호흡에 집중하기로 했다.


숨을 크게 들이쉴 때마다 배꼽 위에 투명한 공이 하나 떠오르는 듯한 상상을 했다. 그 공을 우주 끝까지 밀어 올리듯 천천히 호흡을 끌어올렸다. 끝까지 올라갔다고 느껴지는 순간, 잠시 숨을 멈추었다. 마치 공이 정지한 채 우주 공간 어딘가에서 머무는 듯한 고요한 시간.


그리고 다시 숨을 내쉴 때는 그 공을 아래로 끌어당기며, 배꼽을 지나 엉덩이를 통과해 깊숙이, 지하로, 그리고 더 아래 지구의 중심, 그 뜨거운 핵까지 내려보낸다는 마음으로 호흡을 이어갔다.


그렇게 10분쯤 지나자, 몸이 점차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몸에 열이 퍼지는 기분.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내 익숙한 따스함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블로그에서 우연히 이 호흡 명상법을 접한 뒤로 몇 번 따라 해본 것인데, 내게는 꽤 효과가 있는 듯했다.


단순한 호흡법이라고 하기엔 그 느낌이 꽤 강렬하다. 몸속에 갇혀 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풀려나고, 위로 아래로 흐름이 생기는 기분. 이 호흡을 하고 나면 머릿속이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세상과 단절된 아주 작은 공간에서, 나의 호흡만이 존재하는 짧은 순간. 그 시간이 나에게 조금씩 힘을 준다.


거실에서 하는 명상과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베란다에 앉아 차가운 공기를 마주하자마자, 신선한 겨울 공기가 코를 통해 깊숙이 들어왔다.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뇌였다. 머릿속 전체가 서늘해지며 눈과 피부가 동시에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온몸의 혈관이 순간적으로 쪼그라드는 듯한 강렬한 반응이 일어났다.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나는 감각, 하지만 그 추위는 견딜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묘하게 각성의 시간을 선물해주는 듯했다.


25분 동안 나는 밀도 높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차분히 호흡을 이어갔다. 그렇게 밤새 나를 괴롭혔던 어젯밤의 불쾌한 꿈 조각들을 하나둘 밀어내듯 차가운 숨을 내쉬었다. 공기가 머릿속과 가슴을 스치며 지나가는 동안, 그 찌꺼기 같은 기억들은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고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자 몸과 마음이 가볍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깊고 서늘한 공기가 내 안의 불필요한 무거움을 모두 쓸어버리고 간 듯한 상쾌함이 나를 채웠다.


명상을 마치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따뜻한 차 한 잔을 준비했다. 가늘어진 혈관을 녹이는 온기가 몸에 스며들자, 사우나를 마친 뒤 느끼는 듯한 편안한 기분이 나를 감쌌다.


얼었다가 다시 녹는 이 과정 속에, 내 몸은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깨끗하고 선명해진 정신, 그리고 묵직했던 몸이 가벼워진 이 순간. 나는 책상에 앉아 잠시 손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미소 지었다. 오늘 하루가 분명 나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몸을 다스리는 작은 루틴이 곧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 된다. 그 작은 사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13년 전 풀지 못했던 봉인을 풀기 위해 책을 펼쳤다. 몇 번이나 그 책을 손에 들었다가 다시 덮었던 기억들이 스쳐갔다. 오늘은 달랐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정신이 또렷해진 덕분인지 평소보다 훨씬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드디어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 가위로 조심스럽게 봉인된 부록을 잘라냈다.


작은 기대와 약간의 설렘이 있었다. 그 안에 담겨 있을 무언가 특별한 메시지, 혹은 책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 같은 것들을 기대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펼쳐본 부록은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책의 핵심 내용을 요약한 문장들이 담겨 있었을 뿐이었다.

딱히 실망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감동적인 것도 아니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책에 대한 의견이나 저자의 개인적인 통찰이 아닌, 책 속 문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요약에 불과했다는 것.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의 기대는 조금씩 쌓여 있었지만, 그 기대의 무게가 꼭 특별한 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그 책이 내게 주었던 첫인상과 오랜 동행의 가치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부록이 내게 들려준 말은 짧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쩌면 봉인을 푼 것은 부록이 아니라 내 안에 남아 있던 작은 미련, 혹은 오래된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해답 없는 마무리도 나름의 의미가 된다.


책의 줄거리와 요약은 이미 리뷰로 남겼다. 그래서 오늘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내 개인적인 생각들을 적어보기로 했다. 단순한 감상보다 조금 더 깊은 내 안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 읽었던 찰리 멍거의 문장이 떠올랐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그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이 문장을 보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있다. 어제의 나는 그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내게 필요한 자격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아는 것이 먼저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해 가기 위해선 먼저 내 자격과 상태를 점검하고 채워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오늘 읽었던 책은 그 어제의 고민을 더욱 구체적으로 풀어주는 답안서 같은 존재였다. 어제의 질문이 ‘무엇을 원하는가?’였다면, 오늘의 책은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 다른 매체를 통해 받은 메시지들이 신기할 정도로 서로 맞물리며 같은 결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우연들이 단순히 우연일까? 문득,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나의 의식과 무의식이 흩어진 조각들을 서서히 끌어당기고 있는 걸까. 마치 오래전부터 내가 알고 싶었던 것들이 퍼즐처럼 하나씩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이 경험은 내게 작은 확신을 주었다. 어떤 순간에 우연처럼 맞물리는 경험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에 집중할 때, 그것과 관련된 모든 단서들이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온다.


책을 덮으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제와 오늘, 따로 떨어져 있던 두 문장이 이제 하나의 흐름 속에서 나를 이끌고 있었다. 책의 핵심은 분명했다. 삶 속에서 우리는 관계를 맺고 살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관계 속에서 협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하는 것. 결국 인생은 끝없는 협상의 연속이고 삶은 곧 협상이다!


책은 일상적인 대화에서부터 국제 무역 분쟁과 전쟁에 이르기까지 협상의 다양한 모습을 다루고 있었다. 특히, 저자가 와튼스쿨에서 만난 제자들과의 실제 경험담이 곳곳에 녹아 있어 마치 인생의 축적된 경험집을 읽는 느낌이 들었다.


20년간 영업 현장에서 고객을 직접 대면하며 살아온 나에게 협상이라는 개념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때 협상이란 단어 대신 상담이나 영업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뿐이다. 당시 리더로서 직원들을 교육할 때 내가 자주 반복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인생은 영업이다.”

가정에서도,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직장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영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철학이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먼저 파악해 그것을 제공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 바로 핵심이었다. 돌이켜보니 이 말은 내가 ‘협상’의 본질을 이미 알고 있었던 증거이기도 했다.

다만, 지금 와서 보니 영업이라는 표현보다는 협상이라는 단어가 조금 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워 보인다. 아마 그때 이 책을 미리 읽었다면 나의 표현 역시 조금 더 깊이 있는 방향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싶다.


책은 경험담 위주의 구성이어서 흘려들을 것이 없는 훌륭한 내용이었다. 자기계발서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책이었다. 그러나 2011년에 최초 발간된 책이다 보니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간혹 나를 현재의 맥락에서 살짝 벗어나게 만들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전의 이야기, 대우 사태, 미국의 자유무역 관련 사례들이 대표적이었다.


물론 이는 내가 일부러 가장 초기 발간본을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후 세 번의 개정판이 나왔고, 아마 최신판은 지금 시대의 흐름에 맞게 내용을 수정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속에 담긴 경험과 메시지의 본질은 여전히 유효했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오래된 자기계발서를 선택할 때 시대적 배경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책을 덮으며 나는 문득 내가 과거에 했던 말과 이 책이 전해준 메시지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새삼 이렇게 연결되는 경험이 나를 또 다른 배움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느꼈다.


삶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끝없는 협상과 같은 여정일 것이다. 인생이 곧 협상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조금 더 유연하게, 때로는 단단하게 그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


많은 도움이 된 책이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여러 생각이 스쳤다. 비록 완독하지는 못했지만, 처음 몇 장에서 연필로 밑줄을 그었던 문장들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밑줄을 그은 그 순간의 다짐들을 다시금 상기하며 스스로에게 조용히 약속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새겨 넣는 시간이었다.


책을 덮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오늘의 영상을 시청했다. 사이토 히토리의 <운 좋은 놈이 성공한다>.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라.‘
정말 내가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걸까?’
그리고 곧바로 답하라.
‘아니, 전혀 힘들지 않은데.’
이 말을 하는 순간, 당신은 이미 성공의 길에 올라선 것이다."

하와이 대저택


처음에는 조금 낯선 느낌이 들었지만, 이 문장의 핵심은 분명했다. 나 자신과의 대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달았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부정적인 질문을 던지며 나만 힘든 것처럼, 나만 매번 실패하는 것처럼 느끼곤 한다.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할까?"


하지만 그 질문을 뒤집는 순간, 답도 달라진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은 누구나 겪는 일이다. 그리고 누구나 이겨낼 수 있는 일이다. 영상을 끝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몇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것이 곧 자기 자신과의 건강한 대화, 자기 암시의 힘이 아닐까.


결국 우리가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가가 우리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선택한 말이 내가 가야 할 길을 닦고, 그 길 위에서 조금 더 유연해질 수도, 단단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긍정의 대화는 강력한 무기다.


오늘의 책과 영상이 하나로 이어지며 내게 또 다른 깨달음을 주었다. 나의 선택과 다짐이 이번에는 흔들림 없이 나를 앞으로 이끌어주길. 나는 오늘의 다짐이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는 희미한 확신을 느끼며 페달을 더 힘껏 밟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강도를 높인 페달 덕분에 온몸이 땀에 젖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진 몸을 이끌고 샤워를 마치니 몸은 다시 가벼워졌다. 평소처럼 가사 루틴을 마무리하고 잠시 외출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현관 앞에 서서 잠시 내린 눈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하얗게 덮인 풍경은 언제 봐도 신기하고 새롭다. 손바닥으로 소복이 쌓인 눈을 가만히 담아본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촉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눈뭉치의 감각.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눈싸움을 하고 있다. 마음은 나도 눈 뭉치를 만들어 그 곳에서 아이들과 눈을 던지며 함박눈과 함께 함박웃음을 지으며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고 있었다.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은 그저 손끝에서 녹아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내일은 아내의 생일이다. 몇 일 전 미역국 재료를 사두었지만, 오늘도 다시 마트에 나섰다. 고구마 귀신이 며칠 전 사온 고구마를 이미 다 먹어버려서 다시 장바구니에 고구마를 담고, 소고기와 밑반찬거리를 하나씩 챙겼다. 정월대보름이라고 각종 나물과 견과류등 신선한 채소들이 오늘따라 많이 있었다. 오곡밥까지는 아니어도 간단한 부럼의 의미를 위해 견과류 조금더 담아 보았다.


계산대 앞에서 지갑을 열었다. 세종대왕 두 분과 신사임당 한 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오늘도 세종대왕 두 분으로는 어림도 없군." 나는 피식 웃었다. 결국 신사임당께서 추운 겨울바람 속으로 나오셔야만 했다. 그녀는 마트 캐셔의 손아귀에서 나를 구출하듯 계산을 마치고 사라졌다.


살인적인 물가에 추운 날씨까지 겹쳐 한기가 몸속 깊이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장바구니를 든 손이 묵직할수록 내일 아내가 좋아할 모습을 상상하니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냉장고에 장을 본 물건들을 정리하고 간단히 저녁 준비를 마쳤다. 아내와 막내가 함께 식탁에 앉았다. 따뜻한 저녁 식사를 나누며 소소한 대화를 이어갔다. 내일 저녁엔 딸과 함께 외식하기로 했고, 이번 달 말엔 장남이 근무하는 백령도에 다녀오기로 계획을 세웠다.


백령도.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쉽게 들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일단 계획은 세워보는 것부터가 시작이니 아내와 천천히 일정을 맞춰보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아내는 어김없이 삶은 고구마를 꺼내 들었다.


"역시 고구마 귀신답네." 속으로 웃었다. 작은 고구마니까 적당히 먹고 말겠지 싶었지만, 고구마 귀신의 식욕은 나의 예상을 언제나 초월한다. 나는 잠시 그녀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오늘 정월대보름이다. 잠시 거실 베란다에서 밤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비는 같은 루틴으로 내 자신에게 늘 바라고 있는 올 해의 내 소원을 지금 이 순간 다시 한번 달님에게 잠시 또 기대어 본다.


이틀 사이에 내린 눈 덕분에 도시가 몇 일간 하얗게 변해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하얗게 덮인 풍경을 보니 왠지 마음도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아침에 깊게 들이마신 차갑고 깨끗한 공기의 상쾌함이 하루를 새롭게 만들어준 것 같다. 그 맑은 기운 덕분일까. 오늘 하루는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마음속으로 작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오늘을 마무리했다.


눈 내린 풍경, 따뜻한 고구마 냄새, 가족과의 평범한 저녁 식사…

이 모든 것이 작지만 감사한 하루를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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