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자격은 누구에게 증명받아야 할까? 라는 질문에 답하다.
금주 42일째. 어제 속이 상쾌하게 잠들어서 인지 루틴대로 가뿐히 일어났다. 하루의 시작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힌 것 같다. 언제부터였을까. 기상 후 거실에 서서 아파트 건물 사이로 들어오는 옅은 햇빛을 바라보는 짧은 의식 같은 루틴이 생겼다.
창밖의 풍경은 매일 같은 듯 조금씩 다르게 다가온다. 오늘도 습관처럼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새벽 시간의 움직임이 낯설게 다가왔다. 5시 30분. 그 시간에 벌써 주차장을 빠져 나가는 차량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새삼 느낀다. 어젯밤에는 차 한 대 댈 곳 없던 지상 주차장에도 어느새 이 시간에 느슨하게 빈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그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아직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을 것 같은 새벽이지만, 그 시간에도 이미 분주하게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들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묘하게 든든했다.
지난주에 주문한 책들이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 기다림 끝에 확인해 보니, 주문한 책 중 한 권이 오래전 출간된 책이라 배송이 다소 늦어진다는 문자였다. 예정일은 12일. 예상보다 더 긴 기다림이었다. 조바심이 들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결국 책장 깊숙이 묻어두었던 추억의 책 한 권을 꺼냈다.
스튜어트 다이아몬드의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이 책을 처음 집었던 건 아마도 인천에서 대구로 이사했을 때였다. 낯선 환경에서 처음 마주한 새로운 사람들. 그들과 어울리고 영업 활동을 하기 위해 조금은 절박하게 선택했던 책이었다.
이 책이 내게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작 완독했는지는 가물가물했다. 막연한 기억을 따라 책장을 넘기며 깨달았다. 완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책의 마지막을 펼쳤을 때 더욱 명확해졌다.
책 뒤편, 마치 별책 부록처럼 요약된 정리집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평범하게 펼쳐지는 페이지가 아니었다. 가위로 잘라야만 열 수 있는 낯선 봉인. 13년 전의 내가 그것을 자르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사실이 눈앞에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잠시 멈춰 섰다. 묘한 감정이 스쳤다. 부끄러움, 아쉬움, 그리고 조금의 설렘이.
"이번엔 끝까지 읽고 반드시 이 봉인을 풀어야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기다리던 책이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 그 시간 동안 조급함은 내려놓기로 했다. 대신 천천히 음미하며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책 속에서 단어와 문장들이 차곡차곡 내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그때는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지금에 와서야 선명하게 울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오전 내내 책 속에 빠져들었다. 때때로 커피를 홀짝이며 페이지를 넘겼고, 책의 절반쯤에서 잠시 쉬었다. 남은 페이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봉인된 마지막 장을 풀어낼 그 순간까지, 나는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운동을 시작했다. 페달을 밟으며 동시에 마음을 채우는 시간. 찰리 멍거의 <가난한 찰리의 연감> 이었다. 워렌 버핏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오늘 처음 알았다. 그가 평생을 함께한 유일한 파트너로 불렀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그가 바로 찰리 멍거였다.
영상 속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결심이 섰다. 이 책은 꼭 읽어야겠다. 찰리 멍거의 삶과 통찰이 담긴 이 책이 분명 나에게도 무언가를 남겨줄 것 같았다. 긴 이야기는 책 속에서 직접 만나기로 하고, 오늘은 운동 중 머릿 속에 남았던 문장 하나만 적어둔다. 간결하지만 강렬했던 그 문장들이 땀방울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그것을 얻을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하와이 대저택
찰리 멍거의 이 한 줄. 단순해 보이지만 깊게 들여다볼수록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그 문장 속엔 그의 삶의 방식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자격을 갖춘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성공의 기본 원칙이었다.
나는 곧바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나는 과연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격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더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그럼,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거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의 시선이나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이 아니라, 진짜 내가 원하는 것.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답이 분명해지는 순간, 자격을 갖추는 길이 자연스레 보일 테니까. 다행히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명확하다.
이제는 그 질문에 답할 차례다.
나는 과연 자격을 갖추었는가?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자격’이라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일까? 운전이나 요리처럼 국가에서 공인된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자격은 누구에게 인정받아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되묻자 찰리 멍거의 문장이 한층 더 무겁게 다가왔다. 이건 단순한 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단순하면서도 깊고 복잡한 삶의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인생의 자격 기준은 결국 내가 나에게 정하는 것이라는 걸 말이다. 결국 나에게 필요한 것은 외부의 기준이 아닌 나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내 기준이다. 아무리 깊은 고민을 해도, 마지막엔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행동하는 것이 답이다.
그런데 참 인간이란 존재는 이상하다. 마음속 깊이 행동이 정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것이 답이 아니기를 바라는 심리를 품는다. 얼마 전 읽은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접했었다. 인간은 때로 쉬운 길을 찾고 싶은 본능에 저항하기 힘들어한다고.
나는 지금 그 본능 앞에 서 있다.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려는 미묘한 심리와 대치 중이다. 그러나 답을 미룰 수는 없다. 결국 선택은 내 몫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마다 자격을 갖춘다는 것은 꾸준히 내 앞에 질문을 던질 것이다. "너는 정말 준비됐니?" 아마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과정이, 내가 원하는 것에 가까워지는 길이 될 것이다.
찰리 멍거의 질문,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격을 갖추는 것’이라는 말이 처음엔 단순하고 명쾌하게 느껴졌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질문에 초점을 잘못 맞출 위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이 질문은 자칫 인생을 어렵게 만드는 방식으로 흐를지도 모른다.
만약 원하는 것도 모른 채 자격을 갖추는 일에만 집착한다면 결국 ‘남에게 보여지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삶은 지치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열심히 살아내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노력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그렇게 내가 아닌 누군가의 시선을 따라 증명하는 인생은 결국 쉽게 포기하게 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그 과정을 지나오며 지금까지 버텨온 건지도 모른다.
8살이 되면, 우리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기 위한 삶을 시작한다.
학교를 열심히 다녔다는 ‘학생으로서의 자격’,
정규 교육을 성실히 마쳤다는 ‘졸업생으로서의 자격’,
대학 생활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했다는 ‘우수한 학생이라는 자격’,
그리고 취업을 위해 국가가 정한 자격증을 준비하며
배우자로서의 자격, 부모로서의 자격, 자식으로서의 자격까지…
이렇듯 우리는 평생 자격을 증명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모든 것에 자격을 증명해야만 허락되는 듯한 삶.
그것이 우리가 끔찍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그 자격의 기준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닐 때다. 사회의 요구, 타인의 기대, 관성처럼 흘러온 시간 속에서 정해진 자격만 쫓다 보면 정작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누구인지는 점점 희미해진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세상엔 참 많은 자격이 요구된다.
돌아보면 나도 나름대로 꽤 많은 자격을 갖춘 채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그런데도 여전히 더 많은 자격이 필요하다는 압박을 느끼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한 게 없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들 만큼 충분히 애써왔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문득 걱정스러운 상상이 스쳤다.
혹시 이 흐름이 계속된다면 죽을 자격을 갖춰야만 죽을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건 아닐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자격을 증명하며 살아야 한다면 그건 너무 가혹한 삶이 아닐까 싶었다. 결국 자격이라는 외피보다 먼저, 내가 원하는 삶의 본질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자격이 내 삶을 위한 도구가 되지, 나를 옥죄는 족쇄로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았다.
인생의 절반쯤, 아니 독립적인 삶을 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반드시 결정해야 할 것은 하나다. 바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명확히 하는 것. 이 결정이야말로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정해야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자격의 기준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이 내 안에서 분명하다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을 힘을 가질 수 있다. 내가 정말 원하고 스스로 기준을 정한 일이라면, 그 과정의 고됨도 더는 억지로 증명해야 할 자격이 아니라 기꺼이 감당할 성장의 일부로 바뀐다.
결국 중요한 건 무엇을 원하는지 결정하는 것. 그 결정만 서 있다면, 자격을 갖추는 과정은 더 이상 나를 지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 길이니까. 기준 없이 자격만 갖추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우리는 끝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맴돌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작은 성취의 순간들이 주는 만족감에 잠시 취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곧 또 다른 자격을 요구하는 갈증으로 이어질 뿐이다. 결국 자격을 위한 인생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배우고 있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가령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체중을 65kg으로 감량하는 것이다, 잠시 멈춰 돌아보게 된다.
65kg이라는 숫자가 과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 숫자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65kg으로 감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그것.
나는 이제 분명해졌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혈압약을 끊는 것이다.
벌써 5년째 매일 복용하고 있는 혈압약. 의사 말로는 한 번 복용하기 시작하면 끊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이 약에서 벗어나고 싶다. 의사와 상담한 결과, 그 첫 단계는 체중 감량과 식사 조절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체중을 65kg으로 감량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 혈압약을 끊을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다.
찰리 멍거가 말했던 ‘자격을 갖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여기 있는 게 아닐까?
자격은 단순히 외부에서 요구하는 증명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나 스스로가 나에게 주는 증명이며 또한 그 것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운동을 마치고 책상에 앉아 잠시 상념에 잠겼다. 지금은 땀 흘리고 참고 기다리더라도,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삶이 내가 꿈꾸는 모습일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혈압약을 끊을 자격을 갖추기 위해, 오늘도 나는 내 몸을 움직인다. 그리고 이 작은 움직임들이 내 인생의 진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걸 믿는다.
잠시 앉아서 생각을 정리한다는 것이 시간을 보니 4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샤워도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있다는 것도 그제서야 느끼게 되었다. 샤워를 하고 방에 들어와 체중을 측정했더니 앗! 67kg대에 진입했다.
어제까지 68~69 사이를 오락가락하더니 이제 거의 목표체중에 진입하고 있다. 잘 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에 스스로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남기고 간단한 보상의 식사 후 가사 루틴을 완료하고 잠시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볼링 동호회 모임이 있는 날인데 아내의 컨디션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볼링을 치기에는 좀 무리인 듯 해서 오늘은 쉬겠다고 한다. 덕분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그렇지만 매니저로서의 역할이 취소되면서 오후에 약 3시간의 집중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하루를 정리하며 내용을 읽어보니 일상보다는 생각을 더 많이 적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운동을 하며 다가온 한 줄의 문장에서 느끼는 감정을 이렇게 길게 표현 할 수있다는 것을 보면 조금씩 글을 쓰는 자격을 갖추어 나가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