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혹시 욕망이라는 단어를 욕심과 혼동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
금주 44일째, 새벽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몸을 일으켰다. 어둑한 새벽은 언제나 고요하지만, 오늘은 그 고요 속에 작은 설렘이 묻어 있었다. 아침 루틴을 마치고 책상 앞에 앉는 대신,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아내의 생일이다.
며칠 전,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앞으로는 생일을 2월 2일로 하자. 수술 후 깨어난 그날이 진짜 새로운 생일 아니겠어?”
아내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눈을 흘기며 단호히 거절했다.
“싫어. 그날은 그날대로 의미가 있고, 생일은 생일대로 축하는 많이 받을수록 좋은 거야.”
그 말에 더는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많이 받을수록 좋은 거야." 라니…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내는 한마디를 더 보탰다.
“혹시 선물 같은 거 주기 아까워서 그러는 거면, 필요 없어. 그런 걱정은 하지 마.”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하루가 다르게 예전의 아내로 돌아오고 있구나!”
이런 순간이 그저 반갑고 기쁘기만 할 리 없다. 긴장해야 한다. 아내가 예전의 에너지와 기운을 되찾아간다는 건 곧 내게도 새로운 과제가 많아질 거라는 뜻이니까.
미역을 꺼내 물에 불려놓았다. 조용한 새벽 주방에 물소리가 가볍게 퍼졌다. 잠시 후, 어제 잠들기 전부터 준비해둔 소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핏물을 충분히 빼고 마늘, 후추, 참기름으로 밑간을 해둔 덕분에 고기는 윤기가 흐르고 고소한 향이 은은히 풍겼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고기를 볶기 시작했다.
기름에 고기가 닿자마자 퍼지는 냄새가 주방을 가득 메웠다. 어느 정도 고기가 익어가자 소금을 살짝, 간장을 한 방울 더 넣어 밑간을 맞추었다. 그리고 잘 불려둔 미역을 듬뿍 넣고 물을 붓는다. 마지막으로 다진 마늘을 조금 더 넣으면, 이제부터는 시간이 알아서 모든 걸 해준다.
미역국에 소고기 외에는 아무것도 넣는 걸 싫어하는 그녀의 취향 덕분에, 이럴 때는 오히려 그런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괜한 재료 추가로 실패할 일이 없으니 말이다. 강불로 20분, 약불로 40분.
시간과 불의 조화가 이 미역국의 완성도를 결정한다.
미역국이 부글부글 끓는 동안 나는 조용히 베란다로 냄비를 옮겨놓았다. 천천히 식어가는 시간이 중요하다.
미역국은 처음 끓일 때 싱겁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 서둘러 소금이나 간장을 더 넣는 건 대실수라는 걸 나는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배웠다.
미역국은 식혔다가 다시 데울 때 맛이 깊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물은 더 진해지고, 짠맛도 살짝 올라와 훨씬 더 완성된 맛이 된다.
아내의 출근까지 아직 1시간의 여유가 남아 있다. 미역국이 천천히 식어가는 동안 나는 조용히 책상에 앉았다. 오늘의 일기를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잠시 숨을 고르고 새로운 책을 독서 받침대에 올려두었다.
오늘 선택한 책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유시민 작가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시민 작가는 언제나 명쾌하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책을 소개해준다. 그의 말 속엔 항상 독서를 향한 믿음과 확신이 깃들어 있다. 그런 그가 추천한 책이라면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유시민 작가는 대한민국에서 팬도 많지만 안티도 많은 사람 중 하나다.
손에 꼽을 정도로 많은 안티의 보유자일 것이다. 그가 걸어온 길, 특히 정치적 성향이나 과거의 행적들로 인해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의 정치적 성향을 배제하고, 현재의 그를 보고 좋아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언변이 뛰어난 사람, 혹은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시선은 다르다.
그가 쌓아온 지식의 양과 깊이, 그리고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에서 나는 진심으로 그를 높이 평가한다. 아니, 높이 평가하는 수준을 넘어 그를 존경한다. 그의 논리정연한 토론의 방식, 그가 방대한 지식의 양을 쏟아내며 공감을 불러낼 수 있는 그의 방식을 배우고 싶을 뿐이다.
내가 그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과연 그처럼 침착하고 자연스러운 토론의 장을 펼칠 수가 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어딘가에서 넘치거나 과하게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결심한 나에게 있어 그의 존재는 언제나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이다.
그가 쌓아온 방대한 지식의 무게는 생각과 글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점에서 유시민을 ‘작가로서’ 깊이 존경한다. 물론, 대한민국에는 그 보다 더 많은 지성인과 지식인이 존재한다. 그가 최고의 지성인이라거나, 그의 모든 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 내가 다양한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
그의 말들이 나와 일정 부분 코드가 맞는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의 저서나 추천하는 책은 늘 나에게 흥미롭다. 그의 지식과 시선이 나의 사고를 넓혀주고, 내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오늘 내가 <자유론>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유시민이 추천한 이 책이 어떤 새로운 관점을 던져줄지 기대가 크다.
어쩌면 이 책을 통해 나 역시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실에서 알람이 울리고, 아내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책을 덮고 조용히 주방으로 나갔다. 식어 있던 미역국을 다시 렌지 위에 올려 데우며 눈을 비비고 아직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아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생일 축하해!”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켜 주자 아내는 환하게 웃으며 “고마워”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짧은 상상이 스쳐갔다. 그윽한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며 포옹과 입맞춤, 그리고 생일 아침을 로맨틱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보는 것. 하지만 결혼 28년차의 현실은 조금 달랐다. 그런 드라마 같은 행위는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진정한 용서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비장의 카드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더구나 작년 아내가 퇴원 후 기운을 되찾을 때, 이런 애정 표현을 너무 많이 쏟아부은 탓에 이미 충분히 사용했고, 살짝 식상해질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 우리는 눈인사로 간단히 그 순간을 마무리했다. 아내는 화장실로, 나는 주방으로 향했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함께 아침을 먹으며 아내는 국 한 숟가락을 뜨며 “맛있다. 고마워.” 한 번 더 웃었다. 그리고 출근 준비를 마친 아내가 문을 나서기 전, 나는 다시 말했다. “생일 축하해, 잘 다녀와~”
문이 닫히고, 나는 홀로 남았다.
아내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못다 한 말을 조용히 혼잣말로 속삭였다.
“생일 축하하고…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식탁을 정리하고 차 한 잔을 준비해 책상에 앉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유론>에 몰입할 시간이었다.
오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책 속으로 깊이 빠져들며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었다.
다만 이 책은 속독이 불가능한 책이었다. 빠르게 넘기려는 시도는 오히려 책의 깊이를 놓치게 만들었다.
밑줄을 긋고, 플래그를 붙이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몇 번씩 다시 읽었다.
어느새 시간은 흘렀지만, 머릿속은 더 분명해졌다. 천천히 읽는다는 건 곧 깊이 생각한다는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렇게 한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 꽤 괜찮다고 느껴졌다. 이 책의 줄거리는 나중에 독후감으로 정리할 예정이다.
지금은 책의 내용이 아니라 내 감정에 대해 몇 자 적어본다.
<자유론>은 일반 도서보다 훨씬 얇다.
하지만, 이 책이 주는 무게감은 여느 두꺼운 책보다 훨씬 더 무겁다.
책의 물리적인 무게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사상과 통찰의 무게가 내 머릿속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166년 전, 1859년에 출간된 책이다. 166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더 놀라운 건, 166년 전에 쓰인 저자의 말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현실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이 책을 더욱 무겁게, 더 깊게 느끼게 했다. 마치 오래된 진실의 기록을 읽는 것 같았다.
물론 ‘무겁다’는 것이 곧 ‘어렵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 책은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쉽다고 말할 수는 없을 뿐이다.)
묵직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지나치게 복잡하지 않다는 점이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얼마 전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으며 비슷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80년 전에 살던 사람이 어떻게 21세기 현대 사회를 이렇게 선명하게 예측했을까? 그 글 속에서 발견한 통찰은 시대를 초월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존 스튜어트 밀의 글은 더욱 놀라웠다.
그는 조지 오웰보다 약 4세기 앞선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의 통찰은 지금 내가 사는 세상과 너무나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순간 나는 합리적인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들은 타임머신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오전에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책에 빠져들었고, 솔직히 완독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잠시 여운을 남겨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고, 책의 내용을 잠시 정리했다. 개인적으로 작성하는 독후감의 초안을 간단히 적어둔 뒤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운동복을 챙겨 운동을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며 생각이 다시금 정리되기를, 그리고 아침의 무거운 깨달음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기를 조용히 기대했다.
오늘의 영상은 어제의 후편, 사이토 다카시의 <운 좋은 놈이 성공한다>였다.
영상 속에서 인상 깊었던 말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다.
“욕망은 인간에게 주어진 아주 자연스러운 본질이다.
큰 성공을 원하다면 큰 욕망을 가져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욕망을 따라가라!”
하와이 대저택 - 사이토 다카시
영상을 마치고 책상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순간 스쳤던 질문이 있었다.
‘우리는 혹시 욕망이라는 단어를 욕심과 혼동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
어릴 때부터 “욕심부리지 마라, 욕심내지 마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들었다. 그 말들은 마치 욕망을 크게 품는 건 곧 나쁜 것, 부정적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혹시 그 영향으로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나만의 욕망을 억누르고 인위적으로 조절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읽었던 브라이언 페이지의 <소득혁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욕망은 과유불급이 아니라 다다익선이다.”
그렇다. 욕망은 욕심이 아니다.
그렇다면 욕망과 욕심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짧은 시간 동안 스스로 정리해본 생각은 이랬다.
욕망은 내가 성장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나의 내면에서 비롯된 갈망이다.
반면, 욕심은 외부의 비교와 경쟁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욕망은 나만의 꿈과 목표에서 출발하지만,
욕심은 남과의 관계 속에서 타인의 성공, 위치, 재력을 탐하는 데서 비롯된 감정이라는 차이가 있다.
요즘 나의 상황을 예로 들어보면 더욱 선명해진다.
블로그 이웃들 중에 작가로 성공한 분들을 보며 느끼는 두 가지 감정.
- 욕망은 “나도 더 많이 책을 읽고, 글을 써서 이 작가처럼 깊이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
- 욕심은 “나도 빨리 책을 써서 이 작가처럼 공감과 댓글을 많이 받고 싶다”는 마음.
이게 욕망과 욕심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욕망을 이루기 위한 여정은 과정과 수많은 노력이 결실을 맺어 내가 직접 키운 열매를 얻는 것이다.
반면, 욕심은 과정과 노력 없이 남이 키운 열매를 담 너머 훔쳐 손에 쥐는 것이다.
운동 후 잠시 들었던 이 생각은 내게 중요한 질문을 던져주었다.
욕망을 향해 갈 것인가, 욕심에 휘둘릴 것인가. 그 선택은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로가 될 것이다. 욕망의 길은 멀고 험하지만, 그 열매는 내 손으로 키운 것이기에 더욱 달콤할 테니 말이다.
샤워를 마치고 가사 루틴을 하나씩 정리했다. 시간이 어느덧 아내의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차 키를 챙기고 집을 나섰다. 막내를 학원에서 픽업하고, 아내를 태운 뒤 딸의 회사에 들렀다. 모두의 시간이 딱딱 맞아떨어진 덕분에 동선이 엉키지 않고 깔끔하게 한 번에 움직일 수 있었다.
오늘의 저녁 장소는 인근의 샤브샤브 뷔페. 평일 초저녁이었는데도 사람이 꽤 많았다.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잔뜩 담아와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며 즐겁게 식사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 식당을 선택할 수 있었던 건 금주의 덕분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술을 마셔야 했고, 대리를 부를까, 택시를 탈까 고민했겠지만, 오늘은 그런 걱정이 전혀 필요 없었다. 차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 이렇게 큰 자유를 줄 줄이야. 금주가 가져다준 또 하나의 소소한 기쁨이었다. 식사 중에 막내가 슬쩍 "엄마 가방에 손편지를 넣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는 이미 편지를 직장에서 읽었다고 했다.
“가슴이 뭉클했어. 정말 감동이었어.”
아내는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막내를 따뜻하게 바라봤다. 그 순간이 참 평온하고 좋았다.
딸과 장남도 별도로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는 듯했지만, 그 내용은 굳이 묻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선물은 주고받는 것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으니까.
그런데 그때, 아내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무언가 줄 것이 있으면 지금 당장 꺼내놓으라는 눈빛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묘하게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모른 척 했다.
음식을 가지러 가는 척하며 상황을 회피했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아내는 여전히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모른 척 하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내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번에도 끝까지 모른 척하며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는 나를 뚫어지게 보는 아내를 향해 살짝 윙크를 날렸다.
아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말은 분명히 들리진 않았지만, 살짝 욕 같기도 했다.
아니, 분명 욕은 아니었을 것이라며 나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상황을 피식 웃으며 넘기고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은 여전히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딸을 집에 내려주고 돌아와 정리후 아내와 잠시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는 작년 생일을 병원에서 보낸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오늘 이후 부터의 생일만 기억하면 된다고 앞으로의 생일만 기다리며 살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매년 생일은 우리 부부에게 술과 함께 2차, 3차 내일이 없는 듯 밤을 보내는 시간이었지만, 작년부터 우리의 기념일은 변화를 맞이했다. 나름대로 술 없이 보내는 생일도 의미있는 기념일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워가는 중이라고 할까. 뭔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괜찮다.
나름 의미있었던 아내의 생일은 그렇게 소란스럽지 않으면서도 참 따뜻하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