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의무가 주어지는 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금주 45일째. 몸을 일으켜 천천히 기지개를 켜며 베란다로 걸음을 옮긴다. 내 동작은 너무도 익숙해 마치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반복하는 작은 로봇 같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패턴대로 움직이는 내가 조금 신기하다.
베란다 창을 활짝 열어본다. 찬 공기가 얼굴에 닿자 짧은 한기가 스며든다. 숨을 들이마실 때 코끝부터 폐까지 차가운 공기가 차오르며, 비로소 내가 깨어나는 기분이다. 한참을 그렇게 숨을 고르고 나서야 거실로 돌아온다.
명상에 집중한다. 아주 작은 내면의 소리까지 들리려는 듯 숨을 가다듬는다. 머릿속의 어지러운 생각들이 하나씩 정리되면서 평온이 찾아온다. 명상이 끝나자 나는 책상으로 향해 루틴의 나머지 조각들을 완성해 나간다.
어제에 이어 <자유론>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책은 166년 전의 시대를 관통하는 저자의 치열한 고민과 예리한 시선이 빛나는 기록이었다. 당시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는 인류의 자유와 미래에 대해 나름의 이론을 펼쳐 보인다. 그가 그려낸 이론은 단순한 학문적 논지가 아니었다.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은 저자가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내적 대화를 나누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가 고독한 사색 속에서 스스로와 벌인 치열한 논쟁의 산물처럼 느껴졌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예상되는 반론까지 세심하게 상상하며 다시금 그 논리를 반박하고 증명하는 과정까지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글 속에 녹아 있었다.
물론 그는 이 여정을 혼자만의 힘으로 완성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와의 긴밀한 논의와 대화가 그 기틀을 함께 다졌다고 서론에 밝혔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출간을 앞둔 시점에서 그는 예상치 못한 아내의 죽음과 맞닥뜨렸다. 마지막 원고를 완성해야 할 순간, 그는 홀로 남겨진 것이다. 그 외로움 속에서 자신의 논리를 다시 정비하고, 철저히 논증해나가는 모습. 그는 과정이 얼마나 고독했을까.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혼의 기록 같았다.
이 부분이야말로 저자가 말하는 “해악의 원칙”이 적용된 대표적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자유의 범위가 타인의 권리나 삶에 해가 되지 않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자유란 결코 개인의 무제한적 권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만 온전해질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더 인상 깊었던 점은, 그의 주장이 단순한 이론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논리를 밀어붙이기보다, 그 주장으로 인해 상처받거나 피해를 입을지도 모를 사람들의 입장까지도 고려하며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러한 고민의 흔적은 문장 곳곳에서 느껴졌다.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대화 상대와 끝없이 토론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태도로 책을 써내려 간듯 했다.
이 모든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의 기본 논리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였다. 자유란 타인의 자유와 충돌하지 않는 지점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임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절제와 균형감이야말로, 그는 단순한 사상가가 아닌 시대가 남긴 사상의 전도사라고 말하고 싶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한 이론서이다.인류가 탄생할 당시 인간은 모두 기본적인 자유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가정을 이루고 무리를 이루며 살게 되면서 개인의 자유가 침해 받기 시작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자유를 속박하는 범위는 우리가 예상한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왕, 황제등 권력에 의해 자행되어 오던 자유의 침해는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통해 권력의 이동이 시작되면서 자본을 소유한 일부 개인들이 다수의 대중들을 모아 소수의 자유를 묵살하는 형태로 변질되었으며 결국 이는 진리를 왜곡하는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이 저자의 강한 논리였다.
세상은 얼마나 자주 다수의 목소리에 굴복할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소수의 의견이 침묵 속으로 사라질까. 존 스튜어트 밀은 그 침묵의 위험을 경고하며,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물음을 던진다. <자유론>은 단지 철학적 사색을 넘어, 인간의 존엄과 권리, 그리고 사회가 어디까지 개인의 삶에 관여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강렬한 여정이다.
과정에서 어떤 생각이든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믿음, 설령 그 생각이 틀리더라도, 논쟁을 통해 진리와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모든 사상이 자유롭게 충돌할 때 오히려 더 견고한 진리가 남는다고 했다. 시대가 지난 지금 사람들은 쉽게 자신과 다른 의견을 부정하고, 불편한 목소리를 차단하려 든다.
그러나 진리는 침묵 속에서 자라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부딪히고 갈등하며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개인의 행동의 자유” 또한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살 권리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선택을 하더라도, 그 선택이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이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개인의 책임과 사회적 규제의 균형을 고민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와 닿아 있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가 말했던 자유와 책임 사이의 균형을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어디까지가 개인의 자유이고, 어디서부터가 사회의 책임인가?
밀은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그 질문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내가 가진 생각과 행동의 자유는 타인에 의해 억압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나 자신이 다른 이들의 자유를 무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정한 자유는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그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삶은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진다. 저자의 <자유론>은 결코 과거의 철학서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잠시 책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긴다.
그동안 읽었던 책들로 인해 내면의 성장을 했다면 오늘 자유론을 통해 지식의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좀 더 똑똑해 진 기분이랄까.
오늘 난 그동안 받아야 할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만 알고 있던 자유에 의무를 알게 되었고 이는 내게 진정한 "배움"의 시간이었다.
성장, 실천, 성공, 끈기, 감정 이런 자기 계발의 용어들 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나에게 공부를 시켜주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듯 하다.
오랜만에 교실 책상에 앉아 교과서를 펼친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국민윤리나 사회 시간에 배우던 이론들을 다시 마주하는 느낌. 책 속의 개념과 논리를 찬찬히 따라가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시절 교실에 앉아 노트를 정리하고, 문장 하나하나에 밑줄을 긋던 장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자유론>이라는 책 제목이 처음엔 묵직하게 다가왔던 것도 사실이다. "자유"라는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크고 복잡한 개념이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그 무게감이 더 선명해졌다. 어제 오전 내내 책이 담고 있는 깊이를 머리로 정리하느라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묵직했던 개념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에서 자리를 잡고 나니, 오늘은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이 여정의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로 페달을 힘차게 밟기 시작했다.
오늘 본 영상은 어제 소개했던 사이토 히토리의 <1퍼센트 부자의 법칙>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남은 문장은 영상의 마지막을 장식한 한 줄이었다.
“운은 준비된 자에게 다가오고, 행동하는 자에게 머무른다.”
하와이 대저택
이 한 줄로 책과 영상을 전부 설명할 순 없겠지만, 그 문장은 모든 내용을 압축해 보여주는 듯했다.
흘린 땀의 무게만큼 운과 기회가 내 것이 된다는 메시지.
단순한 진리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깊고 현실적인가를 되새기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결국, 운도 노력이 닿는 곳에 깃든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머지 루틴을 깔끔히 끝낸 후, 소파에 앉았다. 후츄와 오붓한 듯, 그러나 진짜 오붓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이 녀석은 늘 그렇다. 새벽에 내가 눈을 뜰 때면 잽싸게 다가와 나를 깨우고, 베란다까지 졸졸 따라오며 냥냥거린다. 그때는 세상 다정한 고양이가 된다. 하지만 사료와 물을 챙겨주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한 뒷모습만 남긴 채 유유히 떠나버린다. 마치 처음부터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듯이.
이 상황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난 이 녀석의 집사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젠 아무런 저항도 없다. 묘하게도, 그게 꽤 괜찮은 역할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후츄는 나에게 귀한 존재다. 1년에 딱 한 번 정도, 자기 필요에 의해 내 무릎 위에 올라와 곁을 내주는 특별한 날이 있을 뿐. 평소엔 나를 필요할 때만 찾아오는 존재.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이리저리 간을 보며 잠깐 망설이던 후츄는, 결국 냉정히 뒷통수를 남기고 침대로 들어가버렸다. 그 순간, 묘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이게 내 집인데, 왜 내가 꼭 쫓겨난 기분이지…?’
그런데도 그 뒤통수를 바라보며 슬쩍 미소 짓게 된다. 후츄는 언제나 후츄답다.
이 철저히 고양이 중심적 삶의 태도가 어쩐지 대단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던 그 순간, 낯익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머뭇거리다 전화를 받았더니, 이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생이었다. 그는 이제 어엿한 사장님이 된 그다. 퇴사 후 연락도 못 하고 지냈는데, 전화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다.
“연락도 없이 퇴사하는 배신자가 어딨습니까?”
그는 약간 삐친 듯, 그러나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럴 리가 있나, 이건 타이밍이 어긋난 거지”라고 답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간단한 지난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내가 기억했던 그의 활기와 에너지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가 묘하게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한때 함께했던 시간이 잠시 되돌아오는 듯한 기분. 전화 한 통이 주는 따뜻한 여운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늘 그렇듯 “조만간 얼굴 한번 보자”는 말로 전화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는 광주광역시, 나는 대구광역시 물리적으로나 마음적으로나 좀 먼거리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의 “조만간”은 아마도 이렇게 해석하면 좋은 것 같다. 최소 올해 안에, 우연한 계기로 서로의 근처에 갈 일이 생기면 그때 시간이 맞고 특별한 일정이 둘 다 없을 경우에 얼굴 한번 보자는 의미. 즉, 상당히 느긋하고 유연한 약속인 셈이다.
이런 애매모호한 말에도 서로 다 알아듣고 웃을 수 있다는 건 오래된 관계에서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조만간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가 오면 우리는 또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다.
늘 그렇듯.
아내가 퇴근했다. 서로 “고생했어”라는 말로 짧게 안부를 나눈 뒤, 어제 끓여둔 미역국과 남은 음식들로 간단히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특별할 것 없는 메뉴였지만, 그런 대로 충분히 따뜻한 저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에게 꼭 붙어 있지 않아도 편안하게 하루를 정리할 수 있는 익숙한 거리가 되었다.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이 오늘 하루의 끝을 부드럽게 감싸줬다. 큰 일은 없었지만, 그런 날도 충분히 괜찮았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