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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2월 16일 일요일의 웃음

우리 부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함박웃음과 기쁨의 순간을 얻었으니 말이다

by 마부자 Feb 17.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금주 47일째, 변함없이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잠결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베란다로 걸어 창문을 열어 찬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아침의 공기는 언제나 새롭고, 그 맑은 기운을 가슴에 가득 채우며 잠시 명상으로 하루를 준비했다. 어제의 생각을 정리하고, 오늘의 나를 가볍게 맞이했다. 


명상이 끝난 후 책상에 앉아 어제 읽었던 책의 문장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좋은 땅, 좋은 흙, 좋은 그릇에 대한 기억을 통해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마음을 울렸던 단어들을 다시 되새긴 뒤, 블로그에 짧은 포스팅을 남겼다.


오늘은 아내의 특별한 날이다. 볼링장 개인전에 참가하는 날이라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아내를 볼링장까지 데려다주었다. 차 안에서 아내는 설렘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의 조용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활기였다.


“잘 다녀와요. 즐기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렇게 아내를 응원하고 돌아와 책을 펼쳤다.



오늘 손에 든 책은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들의 배>였다. 어제 읽었던 <그릇론>과 마찬가지로 서평 이벤트를 통해 받은 책이다. 이번 이벤트는 출판사 구텐베르크에서 직접 진행한 것이었다.


<바보들의 배>는 예상보다 묵직한 책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찬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속에 깃든 철학적 메시지와 종교적 성찰이 깊게 다가왔다. 시대는 달라도 인간의 본성과 어리석음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책은 때로는 유머로, 때로는 냉정한 직시로 보여준다.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멈춰서 생각하게 됐다. ‘바보’라는 존재는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머물지 않고, 우리 삶의 단면을 대변하는 은유로 보였다. 그 어리석음은 어쩌면 우리 안에도 늘 존재하는 게 아닐까?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때, 타인의 눈에 나는 또 다른 바보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은 내가 탔던 배가 바로 이 ‘바보들의 배’가 아니었나 싶었다. 그러나 책은 그런 순간들을 부끄러워하기보단, 웃음 속에서 교훈을 찾고, 다시 나아가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읽고 나니 묘하게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우리 모두 어리석을 때가 있지만, 어쩌면 그 안에서 성장할 기회가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된 것 같다.


12시쯤 절반가량을 읽고 책을 덮었다. 창밖을 보니 날씨가 꽤 맑았다. 오랜만에 산책을 하기로 했다. 찾은 곳은 연꽃 습지. 평소에는 아내와 함께 자주 걷던 길이지만, 오늘은 혼자였다. 겨울의 연꽃습지는 여름의 무성함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누렇게 마른 연줄 기와 연잎들이 이리저리 엉켜 땅에 찰싹 붙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파리들은 서로 부딪히며 낡고 건조한 소리를 냈다. 


억지로 겨울을 견디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지만, 그 안에도 분명 생명이 있었다. 척박해 보이는 풍경 속에서 묘하게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 건, 아마 그 작은 움직임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른 줄기들 사이로 천둥오리들이 자맥질을 하며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딘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당당한 모습이었다. 연꽃이 만발한 계절엔 감쪽같이 숨어 있던 녀석들이었지만, 이제는 습지의 주인이 되어 이곳을 여유롭게 누비고 있었다. 


물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시 몸을 감추며 물장구를 치는 모습은 소란스러운 듯 조용했고, 어수선한 듯 정돈된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겨울의 연꽃습지는 예상과 다르게 고요하면서도 생기 넘쳤다. 비록 연꽃의 흔적들은 말라붙었지만, 그 바닥에는 여전히 무엇인가가 숨 쉬고 있었다. 찬 공기가 코끝을 얼얼하게 만들었지만, 구름 사이로 간간이 얼굴을 드러낸 햇살이 생각보다 따뜻했다. 


그 햇살 덕분인지 습지에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두툼한 패딩을 껴입고 천천히 산책하는 이들, 삼각대와 카메라를 들고 연신 셔터를 누르는 이들, 트레이닝복에 연신 땀을 흘리며 운동하는 사람들, 반려견과 함께 산책 나온 연인들… 각자의 방식으로 겨울의 습지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나도 이 계절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습지 옆 논으로 시선을 돌리니, 가을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벼들이 어느새 모두 수확되고 짧은 볏기둥만 남아 있었다. 불과 얼마 전에 왔을 때 (생각해 보니 5개월이나 지났다.) 황금빛 이삭이 묵직하게 흩날렸던 자리였다. 


이제 그 자리도 백로와 오리들의 차지가 되었다. 뒤뚱뒤뚱 바닥에서 무언가를 부리로 쪼던 오리와는 달리 한층 우아한 포즈로 볏기둥 사이를 분주히 다니는 철새들의 모습이 발걸음을 붙잡게 만들었다. 


나이를 먹는지 예전에 그냥 스치듯 지나는 풍경들 앞에서 요즘은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게 된다. 잠시 생각하는 시간도 가져본다. 이렇게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들이 풍경에 숨을 불어 넣는다. 


그곳에는 겨울의 시간 속에서 느릿하게 지나가는 풍경들의 모습들과 별개로 가만히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것들이 공존하고 있는 또 하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산책로 인근 복숭아 과수원에서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정리하며 곧 다가올 여름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문득 작년 여름이 떠올랐다. 아내의 재활을 위해 이곳을 자주 찾던 날들. 힘겨웠지만, 이 길을 걸으며 싱그럽게 매달린 복숭아를 보며 천천히 일상을 되찾아가던 그 시간이 떠올랐다. 


복숭아나무에는 여름 햇살을 머금은 붉고 싱그러운 열매들이 맺혀 있었고, 우리는 작은 그늘을 찾아 걸음을 쉬어가곤 했다. 지금은 앙상한 나뭇가지들뿐이지만, 여름이 되면 다시 싱그러운 잎사귀와 탐스러운 열매로 가득할 것이다. 가지치기를 하던 어르신의 손놀림을 바라보며 잠시 그 여름의 기억 속에 머물렀다.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고, 계절은 다시 돌아온다. 


겨울이 아무리 깊어도 결국 봄과 여름은 어김없이 우리 곁으로 찾아온다는 사실이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잠시 우두커니 서서 멀리 과수원을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겨울의 습지는 여전히 쓸쓸하고도 아름다웠고, 그 안에 담긴 작고 소소한 생명들이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하늘 위로 철새들이 일렬로 비행하며 겨울 하늘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뜻밖의 위로였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조용히 말했다. 혼자라도 잘 나왔다고, 이런 겨울의 고요는 꽤 소중한 것이었다고. 찬 공기가 살갗을 스치면서도 부드러운 햇살이 그 냉기를 잠재웠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개인전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소식이었다. 점심은 클럽 사람들과 먹고, 다시 볼링장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즐겁게 놀다 와요. 단, 내일 아프다고 끙끙대지만 않으면 돼요.”


아내는 “당연하죠!”라며 크게 웃었지만, 내일 아침 아내가 온몸이 아프다며 신음할 모습을 눈앞에 그릴 수 있었다.


찬바람을 맞은 탓인지 집에 돌아오자 따뜻한 샤워가 간절했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소파에 앉았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오랜만에 꿈결 같은 짧은 낮잠 중에 막내의 연락이 깨어나게 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4

“아빠, 집에 가는 길인데 추우니까 집에서 먹던 호떡이 생각나요. 제가 반죽 사갈 테니. 같이 만들어 먹어요."


결국 그 의미는 호떡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흔쾌히 수락했다. 어차피 주말은 1일 1식이 제외되는 날이니 덕분에 오늘은 달콤한 호떡으로 당도 충전하고 막내와 함께 따뜻함을 나누는 것도 좋았다.


막내의 손에 호떡 믹스가 두 박스 그러니까 16개을 만들 수 있는 양이 들려있었다. "두 박스나 먹으려고?" 하고 물었더니 왜 두 박스를 사 왔는지 막내가 그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집 근처 마트에 갔더니 8개짜리 한 박스에 4,980원에 판매를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분명 얼마 전 집 앞 이마트에서 같은 제품을 3,980원에 샀던 기억이 났는데 같은 제품을 1,000원을 더 주고 사는 것은 뭔가 찝찝해서 그 이돈을 주고는 사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도 호떡은 먹고 싶어 5분 거리에 있는 이마트에 운동 삼아 갔더니 1+1세일을 해서 3,980원에 두 박스를 사 왔다는 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순간 내가 해야 할 말은 일반적으로 “추운데 뭘 거기까지 걸어갔어, 그냥 가까운 데서 사 오지.”  하지만 그 말 대신 입에서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잘했어! 정말 잘했네!”^^


아들도 내 뜻밖의 반응에 눈이 커졌고, 둘 다 한바탕 웃었다. 어쩌면 그게 정답이었다. 3,980원 많은 돈은 아니지만 오늘 막내의 수고와 작은 돈이지만 철저한 경제관념으로 인해 우리 부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함박웃음과 기쁨의 순간을 얻었으니 말이다. 그런 순간은 예상하지 못할 때 더 큼 기쁨과 행복으로 다가온다. 오늘의 호떡은 이미 따뜻한 추억이 된 듯했다.


막내와 함께 호떡을 만들어 나눠 먹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책 속으로 빠져들던 그때, 아침에 집을 나선 지 8시간 만에 아내가 돌아왔다. 오늘 하루 총 11게임을 쳤는데도 밝은 얼굴로 들어왔다. 뜨거웠던 열정이 아직 식지 않았는지 추운 겨울인데도 현관으로 들어오는 아내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열정과는 정반대의 초라한 성적으로 돌아온 아내는 미안했는지 오늘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텐핀이 문제였고 레인에 오일이 많았다는 등 난 묻지도 않았는데 아내는 계속 오늘 자신의 패인을 나에게 이야기했다. 아내의 얼굴을 보며 난 웃었다. 비웃음이 아닌 감사의 웃음. 이제는 내가 곁에 없어도 혼자 볼링장에서 8시간씩 있다 와서 자신의 모습의 회상하며 나에게 토로하는 투정 섞인 표정에도 난 감사의 웃음으로 화답했다.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다음 달에 다시 한번 도전하자고 달래주고 이른 저녁을 간단히 먹고 아내는 소파에 기대어 오늘의 패배 원인 분석을 해야 한다며 볼링 중계를 보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볼링장에서 보낸 후에도 또다시 볼링을 본다니.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끈기와 의지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역시 피곤했나 보다. 결국 아내는 피곤하다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조용히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마음을 정리했다. 창밖의 어둠이 깊어지듯, 나의 하루도 잔잔하게 마무리되었다. 내일은 좀 더 여유롭게, 조금은 더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도 괜찮지 않을까.


오늘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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