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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2월 15일 토요일의 그릇

좋은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흙이 필요하고 좋은 흙은 좋은 땅에서

by 마부자

금주 46일째. 모든 루틴을 마친 뒤 익숙한 책상에 앉았다. 새로운 책을 펼치기 전, 어제 읽었던 책의 문장들이 천천히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문장 하나하나를 되짚으며 자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쩌면 이 과정은 책을 "복습"한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가슴이 아닌 머리로, 조금은 차분하고 이성적인 시선으로 책을 되돌아보았다.


자유. 그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어렵고 모호한 단어는 쉽게 결론에 닿게 하지 않았다. 아니, 결론이 필요 없는 문제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의미를 명확히 해보고 싶었다. 어제의 책이 던져준 질문들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책을 읽는다는 건 결국 나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그리고 새로운 책을 꺼내 들었다. 며칠 전 서평 신청을 해서 선정된 책이 어제저녁 도착했다. 운이 좋았다. 두 곳 모두에서 선정이 되었고, 그중 먼저 도착한 한 권의 책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포장을 뜯을 때의 설렘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책이 온다는 건 언제나 작은 축제처럼 느껴진다. 얼마 전 교보문고에서 주문한 책까지 더해지니, 이 겨울 동안 읽을 책들이 충분해졌다. 따뜻한 겨울을 나기 위해 더는 연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권승우 작가의 <그릇론>. 어제 <자유론>을 읽으며 오랜만에 교실 책상에 앉은 학생처럼 학구열을 불태웠다. 마치 1교시 수업을 마친 직후, 쉬는 시간도 없이 바로 2교시 수업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2교시의 제목이 비록 <그릇론>이라 해도, <자유론>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마음은 조금 가벼웠다.


1교시 수업이 조금 난해했던 탓인지, 온 신경을 집중하며 책장을 넘기던 그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릇론>은 비교적 수월하게 읽혀 내려갔다. 그렇다고 그 과정이 결코 가벼웠던 건 아니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 여전히 신중함이 묻어 있었다.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작가가 얼마나 참고 견디며 한 줄 한 줄 써 내려갔을지를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 마음을 알기에 어느 문장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으려 했다. 읽을 때마다, 나는 그 문장들 속에 숨겨진 작가의 숨결을 찾아내려는 듯 천천히, 그리고 깊이 집중했다.



늘 하던 대로 책의 줄거리 또는 내용은 서평에 작성하기로 하고 이 책에 대한 내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을 적어보기로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내 안의 그릇을 떠올렸다. 어릴 적 어른들이 자주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릇이 큰 사람.”


그땐 그냥 대단한 사람, 뭔가 잘나가는 사람을 뜻하는 줄 알았는데, 그 말속엔 더 깊은 의미가 있었다.


권승우 작가의 그릇론은 나를 그 단어의 진짜 의미로 안내했다. 내가 만든 그릇의 모양과 크기,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것들이 어떤 상태인지 자연스럽게 돌아보게 되었다.


좋은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흙이 필요하고 좋은 흙은 좋은 땅에서 나온다는 작가의 말. 그리고 좋은 땅의 시작은 어머니의 자궁, 즉 모태에서 시작된다는 작가의 메시지는 내게 깊은 울림과 생각의 시간을 갖게 했다. 나의 성장도 중요하지만 "나"라는 땅에서 태어난 흙으로 빚어진 자녀들에 대한 관점은 새로운 시각으로 이 책을 바라보게 했다.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멈춰야 했다. 세 명의 자녀를 키우며 내가 좋은 흙을 준비했는지, 비옥한 땅이었는지를 생각했다. 그저 흙만 던져놓고 좋은 그릇이 되기를 바란 적은 없었을까? 내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좋은 그릇을 만들기 위한 핵심 가치로 포용력, 겸손, 냉철한 이성, 자기애, 회복탄력성을 강조한 부분은 특히 마음에 남았다. 반대로 그릇을 무너뜨리는 요소들을 나열할 때는 뜨끔했다. 피해의식, 자만, 내로남불… 이런 것들이 낯설지 않았다. 나도 어느 순간엔 그런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책은 결국 내가 얼마나 성찰하고, 내 안의 흙을 다듬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솔직하게 알려준다. 무너지지 않고 더 깊은 그릇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한 노력 이상의 것들이다.


작가는 단순한 조언이나 자기 계발서의 흔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대신 역사의 인물들을 통해 삶의 균형과 깊이를 이야기한다. 처칠, 안창호, 세종대왕, 정조 같은 인물들의 삶은 교훈적이었고, 반면 연산군이나 에디슨의 경쟁자였던 과학자 테슬라, 필름 카메라의 선두주자였던 코닥 등의 같은 실패 사례는 내게 경각심을 주었다.

특히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계산적인 태도와 계획적인 태도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었다.


계산적인 태도는 철저히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반면, 계획적인 태도는 장기적인 목표와 큰 그림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행동하는 태도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구분은 놀랍도록 명확했고, 두 태도가 얼마나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살면서 나 역시 계획적인 태도보다는 순간의 유리함을 계산했던 적이 있지 않을까 싶어 뜨끔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생각이 길게 이어졌다. 내 그릇은 지금 얼마나 단단할까? 나는 어떤 흙으로 내 내면을 채우고 있을까? 그 질문들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내 그릇의 상태를 점검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운동을 하는 것이 나의 일상적인 루틴이지만, 오늘은 주말이다. 주 5일 동안 묵묵히 일한 근육들에게 휴식을 선물하는 날. 오로지 삶은 계란 두 개와 두유 하나로 오전을 버티며 살아온 몸에 작은 보상을 해주는 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오늘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라면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날. 그 특별함은 아무리 반복해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12시가 되자마자,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금주 전의 나는 술을 마신 다음 날이면 반드시 콩나물 라면으로 해장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틀에 한 번은 술을 마셨으니 당연히 라면도 이틀에 한번 먹었다고 봐야 한다. 살을 뺄 수가 없는 식습관이었다.


그렇게 라면을 먹었으니 집에 라면을 사다 놓기가 무섭게 금세 바닥이 났다. 심지어 집에 돌아와 맥주 한 잔을 기울일 때도 안주로 생라면을 부숴 먹는 일이 잦았던 나였다. 생라면의 짭조름함이 맥주와 어울려 그럴듯한 안주가 되었고, 그것마저 나름의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금주를 시작하고 나니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졌다. 이제 라면을 먹을 일이 거의 없었다. 남아 있는 라면은 여전히 찬장 한쪽에 가지런히 쌓여 있지만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평소 같으면 진작 바닥이 났을 양인데, 이제는 나도 모르게 라면 봉지들이 눈에 익숙해진다.


그래서 스스로와 작은 약속을 하나 만들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잘 참아낸 나를 위한 보상으로 토요일 아침에 칼칼한 라면을 먹는 날.


그 약속 덕분에 토요일은 더 특별해졌다. 봉지를 찢고 수프를 넣는 작은 동작조차 의식이 되어버렸다. 김이 피어오르는 냄비를 지켜보는 동안, 지난 일주일의 시간이 잔잔히 흘러갔다. 국물 한 입을 떠 넣는 순간, 아끼던 선물을 조심스레 풀어보는 것 같은 묘한 기쁨이 밀려왔다.


오늘도 그렇게 스스로에게 작은 보상을 건넸다. 충분히 잘 해냈다고, 다음 주도 잘해낼 수 있을 거라고. 아내와 함께 라면을 먹고 외출 준비를 한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우리 집에 넘치는 열정의 주인공은 단연 아내다. 프로 볼링 선수에게도 절대 지지 않을 열의를 가진 그녀는 오늘도 볼링장으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다. 게다가 내일은 볼링장에서 전체 개인전이 열린다. 이미 참가 스케줄도 확정된 상태라 마음은 벌써 프로 볼러가 된 듯한 아내는 대회를 앞두고 일찍부터 몸을 풀어야 한다며 연습을 서두르기로 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평소보다 조금 이른 점심(라면)을 먹었다. 오늘만큼은 느긋한 토요일이 아니라 철저히 경기 전날의 리듬에 맞춘 하루가 되었다.

아내의 이런 모습이 꽤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진심으로 몰입하는 사람에게서는 묘한 에너지가 느껴지기 마련이다. 볼링공을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연습에 나서는 아내의 뒷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문득 웃음이 났다.


그녀에게 오늘의 연습은 단순한 운동이 아닌 내일의 무대를 위한 작은 예행연습일 것이다.


볼링장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 빼곡히 들어찬 차량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만으로도 건물 안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볼링장 내부는 예상대로 북적였다. 각 레인마다 사람이 가득했고, 마치 작은 대회가 이미 시작된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다행히 먼저 와 있던 클럽 회원들이 미리 자리를 잡아 두었다. 아내는 망설임 없이 볼링화를 갈아 신고 레인으로 나섰다. 아내는 볼링공만 잡으면 눈빛이 다른 사람이 된다. 열정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다. 준비 동작부터 몸이 완벽히 경기에 몰입하는 모습이 흐트러짐 없었다.


모든 스포츠가 그런 건지, 아니면 유독 볼링만이 가진 매력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시합 전날 연습의 점수 마법은 확실히 존재하는 듯하다. 아내의 말처럼, 연습할 때는 볼이 레인 위를 매끄럽게 굴러가고, 핀들이 경쾌하게 쓰러지면서 점수가 놀랍도록 잘 나온다. 마치 내일은 분명 무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감을 한껏 부풀게 만든다.


그러나 대회 당일이 되면, 그 기대는 종종 낯선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같은 레인, 같은 공, 같은 사람, 같은 방식으로 변함없는데도 점수는 전혀 딴판이다. 때로는 하늘과 땅 차이로 갈려버린다. "왜 이런 걸까?" 아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묻던 그 순간의 표정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운명의 장난일까? 아니면 볼링이란 스포츠가 본래 그렇게 변덕스럽고 섬세한 감각을 요구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변덕스러움에 아내는 종종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미묘한 차이 때문에 더욱 깊이 빠져드는 듯했다.


아마도 이 차이야말로 볼링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늘 예상할 수 없기에, 어쩌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스트라이크를 꿈꾸며 다시 공을 쥐게 되는 것 같다.

“오늘 제법 점수가 잘 나왔다.” 아내는 흐뭇한 얼굴로 말하며 연습은 여기 까지라고 선언했다. 물론 그 “여기까지”라는 말속엔 이미 5게임이 포함되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3게임쯤 치고 나면 슬슬 피곤하다고 했을 텐데, 오늘은 기세가 다르다. 몸도, 마음도 가벼운 보인다.


불과 며칠 전 이석증으로 어지럼증을 호소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활기를 되찾은 아내의 모습. 그런 아내를 보며 이런 생각을 벌써 해도 되는지 조금은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이제 정말 다 회복된 것 같다”라는 확신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확실히 체력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런 느낌이 드는 순간은 매번 감사할 뿐이다.


헤어질 때, 아내는 클럽 회원들에게 “내일 봐요!”라며 환하게 웃고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참 자연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취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즐기는 아내가 부러우면서도, 살짝 셈이 날 정도였다. 나도 저렇게 몰입할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와 간단히 이른 저녁을 먹었다. 아내는 내일의 컨디션을 위해 일찍 들어가 쉬겠다며 방으로 향했다. 가벼운 걸음이었지만, 그 뒷모습엔 작은 긴장과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나는 속으로 다시 한번 아내에게 박수를 보냈다.


내일 대회는 오전 10시부터 최소 오후 3시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긴 하루가 될 테니 오늘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일찍 쉬는 것이 당연했다. 이견은 없었다. “파이팅!”이라고 작은 응원을 보내며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오늘의 온기를 천천히 되새기며, 내일 아내가 레인 위에서 다시 멋지게 빛나길 기대했다.


그 모습이 벌써 눈에 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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