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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2월 10일 월요일의 시간

난 술을 끊은 것 만으로 1년을 380일을 로 살게 되는 것이다.

by 마부자

금주 41일째, 눈을 뜨자마자 창문 너머로 희미한 어둠이 비쳤다. 아직은 깊은 새벽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분명 이른 시간이겠지.’ 그런 예감에 시간을 확인해보니 시곗바늘은 5시 5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이른 시간임에도 머릿속은 생각들로 잔잔하게 소용돌이쳤다.


어제의 늦잠이 내 몸 어딘가에 흔적처럼 남아 긴장의 수위를 살짝 더 올려놓은 것 같았다. 몸이 무언가를 경계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지나간 하루를 복기하며 스스로를 일으키려는 잠재적인 의지일까.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도 없는 새벽의 고요가 내 안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흘러가고 있었다.


루틴을 마치고 책상에 앉았다. 익숙한 손길로 새로운 책을 펼쳤다. 매일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도 책장을 넘기는 이 순간만큼은 언제나 특별하다. 어떤 책이든 첫 페이지를 열 때면 작은 설렘과 긴장이 함께 찾아온다. 그러나 오늘의 책은 조금 다르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온기가 다른 책들보다 더 뜨겁게 느껴진다.


채사장의 <지대넓얕 무한편>, 이 책은 나에게 그저 새로운 독서의 선택이 아니라, 기다림의 끝에서 마주한 하나의 여정이다. 우연한 계기로 이 시리즈의 첫 권을 읽었던 그때가 떠오른다. 저자의 탄탄한 필력과 방대한 지식의 깊이에 압도되었다. 마치 눈앞에서 지식의 세계가 끝없이 펼쳐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레 2편과 초월편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작가의 독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내 사고의 경계를 넓혔고, 익숙했던 개념들을 낯설게 되짚게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이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무한편이 출간되었다. ‘마지막.’ 이 단어가 주는 아쉬움이 묘하게 오래 남았지만, 동시에 나는 이 책이 나에게 꼭 필요한 필독서라는 직감을 놓을 수 없었다. 오래 기다린 만큼, 천천히, 그리고 깊게 읽어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대넓얕 시리즈는 이제 더 이상 내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첫 권을 읽을 때의 흥미와 설렘은 꽤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어쨌든 마지막 편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싶었다. 이번엔 조금 다를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론에서 실천으로 넘어가는 구조라니, 마침내 그가 지식을 현실로 끌어내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호기심이 생겼다.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은 다른 책들과 조금 달랐다. 지난해 말, 막내가 학생회 간부 활동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며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책을 한 권씩 선물해준다고 했다. 그때 막내가 묻는다. "읽고 싶은 책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나는 망설임 없이 지대넓얕 무한편을 신청하라고 부탁했다.


기대감이 살짝 스며들었지만 이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취소된 걸까? 기다림이 무색해지던 어느 날, 교보문고에서 새로 읽고 싶던 책 네 권을 주문했다. (소득혁명, 멘탈의 연금술, 빛이 이끄는 곳으로, 그리고 역시 지대넓얕.)


책이 도착했을 때, 가장 관심 있던 책은 단연 지대넓얕이었다. 당연히 그 책부터 펼쳤어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이 쉽게 닿지 않았다. 그때 불현듯 서늘한 느낌 같은 게 지나갔다. 어딘가 모를 예감이 나를 잠시 멈추게 했다. 그래서 그 책을 뒤로 미뤄두고 다른 책부터 읽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막내가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아빠, 신청하신 책 내일 올 거래요. 설마 이미 사신 건 아니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이미 샀다고 말해야 할까?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 사긴 했는데… 아직 손도 안 댔으니까 반품하면 돼."


그렇게 어딘가 엇갈리고 뒤엉킨 우여곡절 끝에 오늘, 이 책이 내 책상 위에 올라왔다.


어쩌면 이 모든 과정도 책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작은 운명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고 기다려 마침내 내 손에 온 이 책은 더욱 특별했다. 그렇게 첫 장을 넘기며 오늘 하루를 조용히 시작했다.

쉼 없이 책장을 넘겼다. 단숨에 읽어 내려갔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떠오른 첫 느낌은 아주 간결했다.


‘음… 솔직히 어렵다.’


작가는 첫 장에서부터 경고하듯 말했었다. 이번 무한편은 이전 시리즈보다 더 복잡하고 난해할 거라고. 마치 선전포고 같았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내가 누구인가. 인류의 탄생과 우주의 신비까지 저자의 책을 통해 이해했던 사람 아닌가. 그 정도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다시 읽어도 어렵다.



모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곳곳에서 나를 멈추게 하는 난해한 개념들이 불쑥불쑥 등장했다. 마치 길을 잃은 여행자처럼 그때마다 당황했고, 솔직히 몇몇 부분은 흘려넘긴 것도 있다. 그 사실을 이제는 스스로에게 고백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책에 대한 실망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더 깊은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 삶의 실천적 지혜를 말하려는 저자의 진지한 의도는 분명히 전달되었으니까.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생각들을 조용히 정리해본다. 모든 걸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책에서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앞으로의 삶에 남기느냐다. 때로는 한 권의 책이 답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던져줄 때 더 큰 의미가 생긴다는 걸 깨닫는다.


책은 일곱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다시 현실로 나와 삶으로 이어진다. 구조는 단순했지만, 내가 느끼기엔 조금 과잉이었다. 철학과 명상, 그리고 자기계발의 혼합물 같기도 했다. 물론 채사장은 글을 잘 쓴다. 독자들이 무리 없이 따라오게끔 친절하게 끌어준다. 하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그 친절함이 조금은 피곤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특히, "보는 자와 보는 자가 보는 세계"라는 개념을 다루는 견성 단계에서 이 책의 핵심 메시지가 드러난다. 자아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의식은 모든 것을 일으키지만 통제할 수 없다. 그럴싸하다. 그럴싸한 말들은 많았다. 하지만 내가 깨달아야 할 실체는 여전히 불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불분명한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차피 명확히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니까.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오른 질문은 "나는 이런 걸 왜 궁금해했을까?"였다. 삶은 여전히 복잡하고, 실천은 여전히 어렵다. 깨달음을 구체화하기는커녕, 나는 여전히 내가 만든 규칙 속에서 스스로를 감시하고 있다. "명상도, 침묵도 좋다. 하지만 그게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이 책의 존재 이유는 나름 명확하다.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 점에서는 채사장은 성공했다. 그는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생각의 지평을 넓히게 한다. 다만 그 질문들이 너무 크고, 너무 광범위해서 오히려 답을 찾기 어려울 뿐이다.

결국 이 책은 내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완전한 만족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괜찮았다. 다 읽고 책을 덮으며, 내 삶이 달라질 거라는 기대를 하기보다는 그냥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느꼈는지는 불분명했지만, 읽는 동안의 시간은 적어도 헛되지 않았으니까.


삶의 여정은 계속되고, 나는 여전히 그 안에서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아야 한다. "완전한 깨달음"이란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책을 읽고 질문을 떠올렸다면, 그 자체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완독을 하고 나서도 뭔가 허전함이 밀려왔다. 꼭 무엇인가를 미처 끝내지 못한 기분, 그 찝찝함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흡사 일을 보고 뒤처리를 깔끔히 못한 느낌이랄까. 머릿속이 살짝 어지럽지만, 다시 책장을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책을 읽다 잠시 시선을 돌렸을 때, 아내의 기척이 느껴졌다. 다가가 몸 상태를 묻자 아내는 어제보다는 좀 나아졌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 끝에 여전히 남아 있는 피곤함이 걱정스러웠다.


"빨리 나으려면 병원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아내의 말에 막내가 나선다. "내가 같이 갈게요."

고마운 녀석. 언제 이렇게 자라준 걸까. 아내와 막내가 함께 집을 나섰다. 집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오늘의 운동 영상은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낯익은 화면이 떴다. 얼마 전에 이미 본 적 있는 내용이었다.


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에 대한 영상.

내용은 익숙했지만 다시 들어도 좋았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문장들, 삶의 태도에 대한 정리된 메시지들. 짧지만 진하게 스며드는 문장들이 잠깐의 시간을 채워주었다.


사람에게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삶의 가치를 높이는 능력이 있다.
자신이 꿈꾸는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며
자신이 상상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평소에 기대했던 것보다 큰 성공을 거둘 것이다.

하와이 대저택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운동을 마치니 아내가 집에 들어섰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오른쪽 귀에 이석증이 발생했다는 진단이었다. 의사의 소견은 다행히도 긍정적이었다. 며칠 푹 쉬면 나아질 것이고, 잠잘 때 자세만 조금 신경 쓰면 된다고 했다. 짧은 설명이었지만 그 말 한마디가 큰 위안이 되었던 모양이다. 아내의 얼굴은 병원에 갈 때의 창백함과는 달리 훨씬 밝아져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진료실에서 듣게 되는 진단의 말 한마디는 때로는 그 자체로 치료가 되기도 한다. 불안 속에서 한참을 떠돌다 작은 확신을 손에 쥐었을 때 느끼는 안도감이랄까.


다시 좀 더 눕겠다는 아내에게 늦은 점심과 약을 챙겨주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아프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제발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내가 누운 방 안에 잔잔한 고요가 퍼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방문을 닫았다. 그 고요 속에서 아내가 편안히 쉴 수 있기를,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던 불안이 서서히 사라지기를 조용히 바랐다.


청소와 빨래를 끝내고 커피 한 잔을 마셨다. 한 모금 넘길 때마다 묵직했던 피로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배에서 ‘꾸룩’ 하는 신호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신호였다.


‘아, 드디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시원하게, 아주 깔끔하게 볼일을 마쳤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책상에 앉았지만, 문득 생각이 스쳤다.


‘잠깐… 내가 마지막으로 볼일 본 게 언제였더라?’


머릿속을 더듬어 보았다. 시간을 거슬러 추적해보니 일주일 전쯤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일주일 만에 드디어 화장실에 성공적으로 다녀온 것이다.


내가 굳이 용변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나는 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 지난 20년을 고생해온 사람이다. 이 증상이 얼마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특히 술을 마신 다음 날은 내게 진짜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최소 6번은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평소에도 조금만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 곧바로 복부 경련이 몰려왔고, 그 신호에 반항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화장실로 직행해서 최소 10분 이상을 보내야만 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고통스러운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이런 내게 상추는 거의 독과도 같은 존재였다. 특히 고기를 먹을 때 상추를 함께 먹는 건 최악의 조합이었다. 그날 저녁의 행복은 다음 날의 고통으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화장실에 갇혀 하루 일과의 3분의 1을 화장실에서 보내야 했다.


그런 내가, 무려 일주일 만에 화장실에 갔다는 건 정말 놀라운 사건이다. 그것도 변비도 없이, 아주 시원하게. 마치 교과서에 나올 법한 아름다운 000을 흘려보냈다.(아침부터 이런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ㅠ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대체 무엇이 내 장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들어준 걸까. 그리고 그 답을 찾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든 변화의 출발점은 분명했다.


‘금주.’


지난 41일간의 금주가 내 몸을 천천히, 그리고 분명하게 바꿔놓은 것이다. 이 변화는 단순히 건강을 되찾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소중한 것들까지 함께 가져다주었다.

술을 끊으며 얻은 가장 큰 선물은 시간이었다. 아침마다 화장실에 갇혀 보내야 했던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사라졌다. 술에 취한 다음 날의 무기력함과, 몸의 신호에 종종거릴 필요도 없어졌다. 그런 시간을 대신해 내게 주어진 것은 더 맑은 아침,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 그리고 깊고 고요한 나만의 시간이었다.

금주는 내게 단순한 생활습관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다시 정비할 수 있는 기회이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진짜 나를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금주의 효과, 시간을 숫자로 한번 계산해보면 얼마나 될까?


평소 화장실에 가면 한 번에 평균 15분은 족히 앉아 있었다. 주로 휴대폰을 들고 가 시간을 흘려보냈으니 그 정도는 기본이다. 술을 한참 마신 다음 날엔 최소 6번, 평일엔 보통 3번 정도는 다녀왔다.


이제 계산을 해본다.


현재 금주 40일 × 하루 평균 화장실 횟수 4번 × 15분을 더해보니…

= 2400분, 즉 40시간.

40시간이라니. 40시간을 세이브했다.


다시 말해, 만약 내가 계속 술을 마셨다면 40일 동안 무려 2일을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다는 이야기다. 이게 단순히 화장실에서 보낸 시간만을 계산했을 때의 결과다.(또한 1일 1식을 하면서 횟수가 줄기도 했지만)


만약 여기에 술을 마시던 시간, 화장실에서 지낸 여파로 무기력해 집중하지 못했던 시간, 숙취로 멍하니 보내야 했던 시간까지 모두 더한다면… 그 시간은 어마어마하다.


생각할수록 아찔했다. 그동안 나는 단순히 술 한 잔이라는 이유로 내 인생의 몇십, 아니 몇백 시간을 낭비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고 있다. 이제 그 시간을 되찾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 사실을 술을 마신 지 3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니.


나는 지금에서야 시간을 아껴보겠다고 금주를 결심했지만, 그동안 허무하게 흘려보낸 수많은 시간들이 떠올랐다. 후회보다도 훨씬 깊은, 묵직한 슬픔의 쓰나미가 온몸을 휘감는 기분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금주의 효과를 단순히 숙취를 피하기 위한 방책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용변 사건 덕분에, 전혀 다른 차원의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내 몸이, 그리고 시간이 조용히 내게 말을 걸어왔던 것 같다.

“이제부터라도 잘 관리해봐. 늦지 않았어. 지금부터 얻는 시간은 낭비하지 않으면 돼!”


만약 이대로 내가 정말 술을 끊는다면 365일로 환산해보자

금주 365일 × 하루 평균 화장실 횟수 4번 × 15분을 더해보니…


= 21,900분, 즉 365시간(약 15일), 결국 난 술을 끊은 것 만으로 1년을 380일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 단순한 계산으로도 내가 삶을 늘릴수 있다는 것이 바로 내 삶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볼일 이야기를 여기서 마무리하고 자연스럽게 저녁 이야기로 넘어가려니 약간 어색한 감이 있지만… 어쨌든, 저녁은 맛있게 먹었다.


아내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나와 함께 저녁을 먹고,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신 후 볼링 게임 삼매경에 빠졌다. 작은 행복이 고스란히 얼굴에 배어 있었다. 컨디션이 좋아진 모습이 다행스러워 마음이 놓였다.


나는 조용히 하루를 정리했다.


설렘 가득한 책을 읽었고, 다소 찝찝했던 기분금주라는 전혀 다른 대안으로 깔끔하게 씻겨 나갔다.


결국, 오늘은 시원하고 상쾌한 하루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몸과 마음의 균형이란 결국 사소한 순간들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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