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 푸른 뱀의 해 첫날 책 속에서 만난 9명의 현자들
2025년 첫날, 나는 일기장에 펜을 들었다. 아니, 이것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올 한 해의 다짐을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직장에서 팀원들에게 내가 늘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 뜨는 태양과 내일 뜨는 태양은 같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 안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이 말의 깊이는 지금도 나를 사로잡는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동물적인 생존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시간을 나누고 그 안에 무언가를 새기며 의미를 만들어 간다.
365일의 주기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는가?
1년이라는 시간은 단지 365개의 날들의 조합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하나의 순환이다. 성공, 실패, 좌절, 실망, 아픔 같은 경험들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을 넘고 다시금 발을 디딜 수 있는 발판을 얻는다. 그 발판 위에서 우리는 현재를 준비한다.
지난 2024년은 내 인생에서 결코 잊지 못할 해였다. 유아인이 영화 베테랑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올해 감기가 제일 독하고, 올해 경기가 제일 안 좋다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죽었나요?" 힘들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던가. 하지만 2024년은 내게 분명히 가장 힘들었던 해였다. 그러나 난 포기하지 않았다.
올해를 세세히 되돌아보는 것은 때로 무의미한 고통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더 많으니까. 하지만 특별히 내 마음에 남아있는 세 가지 사건만큼은 기록해 두기로 했다.
첫째, 아내의 뇌출혈과 기적 같은 회복.
둘째, 27년간 몸담았던 회사에서의 퇴사.
셋째, 독서와 글쓰기 통해 새롭게 시작한 인생 도전.
이 세 가지는 내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중요한 의미를 던졌다.
아내의 사고는 내게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나는 운동을 시작했고, 스스로를 더 돌보기로 결심했다. 회사 퇴사는 낯선 두려움을 동반했지만, 그 덕분에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위에 독서라는 습관이 더해지며 이제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명상을 마치고 베란다 창문에 기대어, 새벽 차가운 공기와 함께 아파트 사이로 밀려오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어제의 태양과 같은 태양이었지만 내게는 분명히 달랐다. 연한 주황빛으로 시작해 붉게 물들고, 마침내 환한 빛으로 변화하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올해의 목표를 다시 떠올렸다.
"책 200권 읽기, 책에 미친 사람처럼 읽어 보기."
이 다짐을 이루기 위해 나는 읽고, 쓰고, 공감하며, 기록하는 루틴을 정착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 첫걸음을 오늘 내디뎠다. 그리고 그렇게 올해 첫 책으로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아주 오래된 가르침"을 선택했다. 오전 7시에 책장을 넘기기 시작해 11시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책의 내용을 곱씹으며 손을 책표지 위에 얹고 잠시 눈을 감았다. 9명의 현자들이 전해 준 가르침이 내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나는 이 가르침을 내 인생의 한 권의 책, 현자의 서로 완성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우연히 1월 1일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피그말리온 효과처럼,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일이 무의식적으로 현실로 다가온 것이리라. 그렇게 나는 목표를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금 시작하라, 그냥 시작하라. 그리고 더 해라!" 이 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올해의 나를 다그친다. 200권이라는 거대한 목표도 첫 권부터 시작하는 법. 오늘 나는 첫날을 진정으로 의미 있는 하루로 만들었다.
2025년, 내 인생의 새벽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제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늦잠을 잔 아내와 아들이 깨기 전에, 인근 떡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방앗간을 함께 운영하는 떡집은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단골의 발길로 북적였다. 떡국용 떡은 찰지고 고소한 향이 났다. 그 맛있는 떡을 손에 쥐고 돌아오며, 올해의 첫 떡국은 사골곰탕 국물로 끓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곰탕 국물은 시중에서 손쉽게 구매한 팩이었다. 요즘은 육수도 참 다양하다. 그 덕에 주방은 예전보다 간편해졌지만, 여전히 정성을 담아 준비하는 마음만큼은 변치 않으려 애쓴다. 주방에서 나는 떡만둣국 냄새에 귀신같이 일어난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한 살을 더 먹었다. 양으로 치면 세 살은 더 먹은 듯할 정도로~~~
막내가 내일 친구들과 볼링 시합이 있다며, 오늘 볼링장에 함께 가자고 한다. 사실 오늘은 좀 쉬려고 했는데 아내도 아내는 그 말을 듣더니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엄마는 가고 싶지 않았는데 아들이 가자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가야겠네"라는 말되 되지 않는 핑계 같은 핑계를 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준비를 한다. 결국 그렇게 난 오늘도 무보수의 아내 매니저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게 되었다.
볼링장에 들어서니 새해 첫날답게 가족 단위의 손님들로 북적였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가족들이 볼링공을 굴리며 서로를 응원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공이 핀을 쓰러뜨릴 때마다 울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도 커졌다. 볼링은 단순한 스포츠 이상의 매력을 가진 활동이었다. 한자리에 모여 서로에게 에너지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아내는 볼링장에서 아들과 함께할 때 유독 목소리가 커진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그것은 즐거움과 흥분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톤이었다. 아들과 경쟁하며 서로를 놀리고 웃음을 터뜨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나는 새삼스레 생각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이런 순간들에 깃든 것이 아닐까.
나는 공을 굴리지 않았다. 그러나 시선은 늘 두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내와 아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은 내 마음을 조용히 덥혔다. 그들의 웃음 속에 스며든 나의 미소가 얼굴에 번져 나갔다. 오늘의 짧은 내기, 저녁 메뉴를 고르는 시합이 시작되었다. 아내는 중국집을, 막내는 햄버거를 선택했다. 마이볼로 자신 있게 나선 아내는 핸디 70점을 내주며 경기를 시작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막내는 핸디 없이도 아내를 이겼다.
나는 막내의 자세를 약간 고쳐주었다. 그 작은 교정이 그에게 터키를 기록하게 하고, 볼링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얻게 해주었다. 그렇게 기뻐하며 환하게 웃는 막내와 예상치 못한 패배에 살짝 씁쓸해하는 아내의 표정을 번갈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행복을 느꼈다. 행복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의 표정이 전하는 온기로 차오르는 것이었다.
볼링장에서의 시간이 지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함께 즐긴 시간 덕분인지 차 안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내기에서 이겨 자신감이 붙은 막내는 아내에게 언제든 다시 도전하라고 능청을 떨었다. 차 안을 가득 채운 그 행복한 기운 덕분에,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차의 히터가 필요 없을 정도로 훈훈했다.
저녁은 막내의 승리로 결정된 햄버거였다. 드라이브스루에서 햄버거를 받아 돌아오는 길,
뒷좌석에서 아내가 불쑥 말을 꺼냈다.
“우리 애들은 당신이 참 좋을 거야. 당신은 아이들하고 친구처럼 지내잖아. 그게 참 보기 좋아.”
그 말을 들은 아들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아빠 얘기만큼 친구들에게 자주 하는 이야기도 없어요!”
아내는 이어 말했다.
“난 그래서 당신이 참 좋아.”
그 한마디가 내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왜 아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그 따뜻한 대화는 내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깨닫게 했다.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문장, “난 그래서 당신이 좋아”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추운 1월의 바람도 그 말 앞에서는 그저 부드럽게 녹아내릴 뿐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새로운 책을 펼쳤다. 제목은 “그럼에도 행복한 이유”. 얼마 전 블로그 이벤트에서 당첨되어 받은 책이었다. 포장도 뜯지 못하고 책상에 올려두었던 이 책은, 오늘의 내 일상을 미리 예고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책의 제목 위에 타원으로 써진 작은 글씨가 오늘 내게는 너무 크게 느껴졌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난 오늘 이 말을 너무 많이 가슴으로 느끼는 하루였다.
최근 몇 년 동안 내 일기에서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잘 쓰지 못했다. 아내가 쓰러진 이후, 그 단어를 말하는 것이 낯설고 어려웠다. 함께 일상을 보내는 지금이야 비로소 행복을 느끼지만, 그 시절의 나는 행복이라는 표현을 아끼고 또 아꼈다. 그런데 오늘, 제목에서 살짝 스친 그 단어가 나를 움직였을까? 오늘 하루는 그야말로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스로가 이렇게 솔직히 인정할 수 있음이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2025년 1월 1일. 이렇게 행복으로 가득 찬 하루를 일기로 기록하며 마무리한다. 이 따뜻한 마음이 올해 내내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으며, 오늘의 소소하지만 깊은 감동을 가슴속에 새긴다.
오늘은 지나가지만, 마음속 따뜻한 순간들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