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미래에 피어날 희망의 역사를 준비하는 중이다.
금주 15일째의 아침.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어나 나만의 루틴을 충실히 따라갔다. 아침마다 작은 성취감을 안겨주는 이 과정이, 하루의 시작을 다부지게 다져주는 힘이 되곤 한다. 그리고 마침내 책상에 앉아 어제 오후부터 읽기 시작한 책을 펼쳤다.
어제 오후부터 읽던 책을 펼쳤다. 얼마전 읽었던 “어떤 비밀”이라는 에세이를 쓴 작가 최진영의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였다. 몇 일전 딸에게 세탁기 수리비로 대신 받은 그 책이었다.
최진영작가의 책은 이번에 두번째이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에세이를 보면 굉장히 감성적이면서, 부드럽고 감미로운 필체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딸이 나에게 선물하며 아주 조금 스포를 한 것이 있다면 약간은 동성애에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 책이라고 해서 더욱 감성을 기대하고 책을 펼쳤다.
그러나 책의 첫 장은 나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감미롭고 감성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던 내 마음을, 책은 냉혹하고 무거운 세계로 단숨에 밀어 넣었다. 첫 문장이 내게 던진 물음은 곧바로 일상의 편안함을 뒤흔들었다.
"당신은 한국을 아는가?
한국은 아직 그곳에 있는가?"
이 질문은 마치 무언가 상실된 세계로 나를 초대하는 듯했다.
원인 모를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면서 병보다 더 무서운 광경이 펼쳐진다. 병을 고치려면 어린아이의 간을 먹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은 사람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다. 인간은 인간을 죽이고 약탈과 살인이 일상처럼 행해지는 공포의 도시가 되어갔다.
가족이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가족이라도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러시아로 떠나는 사람들. 하지만 그곳 역시 무법천지의 혼돈 속에 빠져 있다. 황량한 도시를 배경으로, 갈 곳도 없이 그저 해가 저무는 방향으로 떠나는 다섯 사람의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저마다 다른 상처와 사연을 안고도,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는 그들의 모습은 차갑고 절망적인 풍경 속에서 더욱 도드라졌다. 한편의 좀비 영화 같은 이 이야기에, 나는 잠시 딸이 이 책을 잘못 선물했는지 의구심을 품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중반에 접어들 무렵,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이 등장했다. 서로 전혀 인연이 없던 다섯 사람은 우연히 엮이게 된다. 그들은 잠시 인연을 맺고, 다시 헤어지며 복잡한 인간사를 그려냈다. 사랑, 분노, 고독… 인간의 심리가 날카롭고도 섬세하게 묘사되며, 이야기는 단순한 생존기에서 더 깊은 내면의 성찰로 변모해갔다.
읽는 내내 무거운 숨을 몰아쉬며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나는 이 책이 단지 암담한 서사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예리하게 꿰뚫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망과 혼란 속에서도 인간은 서로를 통해 무엇인가를 배우고, 느끼고, 사랑할 수 있음을 작가는 집요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딸이 이 책을 내게 선물한 이유가 이제야 조금 이해되는 듯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다시 한번 느꼈다. 정말 작가는 대단하다. 요즘 읽는 책마다 이런 감탄을 반복하는 내가 스스로 우습기도 하지만, 매번 느껴지는 이 경외심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런 상상력과 표현력은 단숨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문장이 섬세하게 직조되어 있고, 이야기 속 모든 감정과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이런 작품은 분명 오랜 내공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상을 꿰뚫는 시선,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생생한 묘사, 그리고 우리가 쉽게 놓칠 수 있는 인간의 본질을 끝까지 탐구하는 작가의 태도. 이런 것들이 결국 한 권의 책에 녹아들어 나 같은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 아닐까.
책을 덮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작가를 향한 존경과 부러움이 뒤섞인 마음이 일었다. 언젠가 이런 책을 다시 마주하게 되길 바라며, 이 독서의 여운을 조금 더 오래 간직하고 싶다. 아마 이 책도 내 마음속 오래도록 남을 책 목록에 추가될 것이다.
책의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무법천지로 변한 공포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작가의 필체가 감성적이고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약한 사람들을 이유 없이 죽이고, 약탈하며, 성적인 윤리를 무참히 짓밟는 사람들이 난무하는 암울한 세계. 그런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그녀의 문장은 거칠거나 폭력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특히 어둡고 차가운 겨울, 주인공을 옥죄어 오는 장면들 속에서조차 작가는 독특한 감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얼어붙은 공기를 느끼게 하면서도, 문장은 오히려 따뜻하고 잔잔한 여운을 남기곤 했다. 독자가 자연스레 긴장을 풀게 만드는 그녀의 필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세계의 잔혹함을 더 선명히 드러냈다. 따스함과 잔혹함이 뒤섞인 이 기묘한 감정이, 때로는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문장이 가볍게 흘러가면서도, 묵직한 주제를 놓치지 않고 독자에게 전달하는 능력은 정말 대단했다. 마치 차가운 얼음 위를 걷는 주인공의 모습과 겹쳐지며, 나 역시 그 이야기에 빠져드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런 극단적인 대비 속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작가의 감각은 단순한 서사 이상의 깊이를 느끼게 했다. 그녀의 문장은 그 공포와 고통 속에서도 인간다움이라는 희미한 빛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마지막에 분명히 적어 두었다. 이 책의 마무리와 중간의 비어 있는 부분들, 그리고 의도적으로 남겨둔 궁금증은 독자들이 나머지를 스스로 상상하며 채워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그 말을 읽는 순간, 마치 이야기가 나를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하며 조용히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듯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나는 자연스럽게 책 위에 손을 얹었다. 마치 작가와 대화를 마치고 난 뒤, 서로의 감정을 정리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만의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작가가 남겨둔 빈칸 사이사이에 내 상상이 자리 잡았다. 그 다섯 사람은 어디로 향했을까? 그들이 품고 있었던 상처와 희망, 그리고 서로의 흔적은 결국 어떤 결말을 맞았을까? 모든 답이 완벽하게 제시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가 내 머릿속에서 피어났다.
이런 순간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가장 특별한 시간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야기를 덮고 나서도 끝나지 않는 여운, 그리고 나만의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 책을 읽고도 나만의 한 권을 더 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글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고, 나는 그 세계의 일부를 완성해가는 기쁨을 누렸다.
이 책은 제목과 표지만으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감동 이상의 감동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단순히 읽는 재미를 넘어, 내 마음 깊숙이 여운을 남기는 책을 만나게 되어 무척 행복했다.
책을 덮고 나니 자연스레 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생각하며 이 책을 선물해준 그녀의 마음이 다시금 느껴졌다. 그녀가 가진 책을 고르는 안목은 어쩌면 나보다 훨씬 뛰어난 것 같다. 어쩌면 그녀는 내가 이 책을 통해 어떤 감정을 느낄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 다른 책을 몇 권 선물해 달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물론 딸의 경제적 여건도 충분히 고려 해야 겠지만……)
책을 읽고 오후 루틴을 시작했다. 가벼운 웨이트로 몸을 푼 뒤, 자전거 페달을 밟기 위해 유튜브를 켰다. 그런데 화면 속 뉴스 피드에 쏟아지듯 등장한 제목들. "윤석열 대통령 체포." 놀라움에 자전거를 멈추고, 그 뉴스 영상 중 하나를 틀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순간이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기성세대로서 미래 세대에게 또 하나의 부끄러운 역사를 추가한 듯한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침 어제 읽었던 "이슈 한국사"가 떠올랐다. 대한민국의 10대 이슈를 다룬 책이었는데, 오늘 뉴스 속 현실은 그 책의 가장 어두운 장면 중 하나에 추가될 법한 이야기였다. 그래서일까, 이번 사건이 주는 무게는 더욱 깊게 다가왔다.
정치라는 주제는 언제나 민감하다. 백 명이 있으면 백 가지 의견이 있고, 천 명이 있으면 천 가지 생각이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평론가도, 학자도 아니기에 이에 대해 함부로 말을 보탤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의견을 꺼내기 전에 얼마나 복잡한 논의와 다른 시각이 얽혀 있는지 떠올리면, 결국 침묵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오늘 하루가 답답하고 마음 아픈 하루로 기억될 것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저 조용히 이 상황을 기록하고, 어쩌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 스스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몫은, 이러한 순간을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며, 다음 세대를 위해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역사는 이미 지나간 시간의 기록이다. 그것은 현실이었지만, 지금은 과거로 고스란히 넘어갔다. 그러나 역사가 과거라는 이유로 결코 사소해지거나 잊혀질 수 없다. 며칠 전 나는 책을 읽고 깨달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그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일이 아니라, 과거의 선택들과 사건들이 직조한 결과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깨달음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마주한 이 현실은 치명적일 만큼 아프고 무거운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아픔 속에서 나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의 잘못된 발걸음을 철저히 분석하고, 그 실패를 반추하며, 다시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방향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는 단순히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우리를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토대라는 것을.
오늘의 나는, 이 가슴 아픈 현실이 언제까지나 우리의 발목을 붙잡아 두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역사가 아픔만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희망,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낼 새 역사의 가능성을 마음에 품는다. 희망의 씨앗은 늘 가장 황폐한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법이다. 그 뿌리가 자라난 곳에서 언젠가는 희망의 꽃이 피어날 것임을 나는 믿는다.
역사는 과거이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미래다. 우리가 어떤 태도로 마주하고, 어떤 자세로 배우느냐에 따라 역사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은 결코 헛되지 않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미래에 피어날 희망의 역사를 준비하는 중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늘 보던 자기계발 영상을 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제 보던 부분 이후로 영상을 보며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책에 나온 좋은 말들을 머릿속에 새기며 오늘도 기억나는 문장을 몇 개 적는다. (출처: 하와이 대저택)
“자신 안에 무한한 컴퓨터를 두고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방치하고 있으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안타까움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잠재의식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그것만이 인생의 성공으로 가는 길이다.”
“대부분은 생각으로 인생을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본능에만 기대어 사는 것’ 이라고 부른다.
운동을 마치고 샤워로 땀을 씻어내고, 하루의 계획을 모두 마무리한 뒤, 문득 다시 TV를 켰다.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무거움을 떨쳐내고 싶어서 였을까. 화면 속에는 여전히 대통령 체포라는 소식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마다의 기준으로 논평을 쏟아내는 언론들, 분열된 목소리들 속에서 차가운 겨울 밤을 견디고 있는 국민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대통령의 짧은 영상. 모든 장면들이 현실이라는 사실이 더욱 실감 나게 다가왔다.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마음이 가라앉아, 책 속 문장들이 내게 위로가 되기보다는 더 큰 공허함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금주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 나는 분명 만취했을 것이다. 술이라는 손쉬운 도피처가 필요하다고 느낄 만큼 무거운 하루였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나는 내 결심을 지키기로 했다. 이런 일로 인해 내가 세운 의지를 꺾는다면, 그 것 이야말로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휘둘리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될 뿐이리라.
대신 깊은 숨을 한 번 내쉬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오늘을 정리하기로 했다. 세상은 흔들리고,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작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서도 나만의 태도를 지키며 하루를 끝맺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아마도 오늘 밤은 깊은 숙면으로 이 무거운 하루를 털어내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