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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1월 19일 일요일의 기억

이 겨울 연꽃습지는 지난 봄의 우리의 재활과정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by 마부자 Jan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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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 19일 째, 퇴사 후 맞는 일요일, 그것은 더 이상 과거처럼 "쉬어가는 날"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매일이 일정하고, 매일이 비슷한 리듬으로 흐르는 나날 속에서 일요일도 단지 하나의 또 다른 "오늘"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반복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의 성장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오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단순한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어떤 완성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과정으로 느껴진다.


오늘 아침도 다르지 않았다. 루틴대로 하루를 시작하고, 내가 정한 반복의 과정을 성실히 수행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오늘은 책을 펴지 않았다. 아침의 고요함 속에서 잠시 멈춘 나의 손과 눈은 어쩐지 오늘의 나에게 여유를 허락한 듯했다.


오늘 볼링 시합에 출전하는 아내를 시간 맞춰 아내를 깨워야 한다. 동네 볼링장에서 매월 열리는 시합이지만, 그 분위기와 무게감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약 60명이 참가하는 대회는 클럽 회원들 중에서도 실력자들이 모이는 자리다. 남녀 구분 없이 치러지는 만큼 여성에게는 더 큰 도전이 될 수밖에 없는 시합이다. 


그 중에서도 작년에 아내가 우승을 차지했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녀의 그날의 승리는 단순한 기록 이상의 감동으로 우리 둘에게 남아 있다. 매월 있는 경기지만 오늘 아내는 조금 다르다. 아내가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통 늦잠을 자는 그녀가 일찍부터 서둘러 준비하는 모습은 오히려 낯설 정도다. 잠을 설쳤는지 눈에 피로가 묻어 있고, 그 움직임은 평소의 여유로움을 없어 보였다.

이해할 수 있다. 비록 작은 대회라 해도 긴장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시합은 그녀에게 작년의 영광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날이기도 하다. 


아내에게는 평소보다 두 배, 아니 세 배 이상의 압박이 느껴질 것이다. 이 작은 대회장이 그녀에게는 순간적으로 북극 한가운데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얼음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정하면서도 동시에 새롭게 도전해야 하는 설렘이 공존하는 순간.


그녀의 마음을 조용히 응원하며,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녀가 스스로를 믿을 수 있도록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녀는 자신의 순간을 만들어낼 것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 순간을 우리는 함께 기억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볼링 시합은 10시에 시작하지만, 경기가 끝날 때쯤이면 이미 오후 2시. 네 시간 동안의 집중과 체력 소모를 생각하면, 아침 식사를 놓치는 건 무리다. 그렇다고 대회 전에 과하게 먹는 것도 부담스럽다. 딱 적당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럴 때를 대비해 어제 저녁, 닭볶음탕에 넣으려고 샀던 고구마를 미리 손질하며 한두 개를 찌는 생각이 들었었다. 작은 고구마 몇 개를 부엌에서 손수 꺼내 쪄두는 그 단순한 행동이, 오늘 아침 이토록 유용할 줄은 몰랐다.


잠시 후, 아내가 고구마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 고구마를 다 쪄놨어? 만약 오늘 내가 우승하면 이 고구마 덕분일 거야,” 


농담처럼 건넨 그녀의 말에 둘 사이에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내가 느끼는 소소한 행복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다. 별것 아닌 나의 작은 행동 하나가 아내에게 힘이 되고, 그녀의 가벼운 한 마디가 내 하루를 환히 밝히는 것. 삶은 거창하지 않은 것 들로도 충분히 채워진다.


그렇게 아내와 함께 고구마로 속을 채우고 볼링장으로 출발했다. 볼링공의 무게와 긴장감이 그녀를 잠시 흔들 수는 있겠지만, 오늘 그녀의 발걸음은 고구마 한 알처럼 소박하지만 단단하다. 나는 그 길을 조용히 함께 걸으며, 그녀가 이 시간을 온전히 즐기기를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볼링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우리는 익숙한 대화를 나눴다. 긴장하지 말라는 조언, 힘을 빼라는 격려, 투구에만 집중하라는 코치다운 잔소리 아닌 잔소리. 나의 말은 아내에게 다가갈 때마다 가벼운 핀잔으로 되돌아왔다.


“어차피 뒤에서 보고 있을 거면서, 던지고 나오면 그때 말해주지 뭘 벌써부터 잔소리를 해?”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농담 속에는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긴장이 살짝 스며들어 있었다.

“오늘은 나 뒤에서 안 볼 거야,” 


나는 일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게임 시작하면 바로 근처 커피숍이나 차로 가서 책 읽다가 마지막 게임 끝날 즈음에 다시 올게.”


아내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볼링장 휴게실에서 읽으면 안 돼?”


“거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아이들 뛰어다니잖아. 집중이 안 돼.

그제야 아내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딘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 내가 뒤에 있으면 더 마음이 불편한 거 아니었어?”


“아니, 그런 것보다는... 혼자 차에 있는다고 하니까 미안해서 그렇지.” 

하고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 말이 고맙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했다.

“난 오히려 책 읽는 시간이 더 편해. 그러니까 당신도 마음 편하게 잘 쳐서 꼭 1등해.”


그제야 아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 그럼 진짜 잘 칠게!”


그 대화는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우리만의 방식이었다. 부담을 주지 않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오갔고, 그 덕에 차 안의 공기는 창 밖 날씨처럼 푸근하고 온화했다.


볼링장에 도착했을 때, 내부는 전혀 다른 온도로 가득했다. 60명의 참가자들, 그들의 에너지가 공기를 달궜다. 진지한 표정, 흥분된 목소리, 속삭이는 전략들. 그 모든 것이 섞여 볼링장 전체가 후끈거렸다. 하지만 나는 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아내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 믿었다. 서로의 마음을 나눈 차 안의 온기를 기억하면서, 그녀는 자신만의 리듬으로 경기에 임할 것이다.


접수와 레인 추첨을 마치고 대회 시작을 알리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10시였다. 모든 참가자들이 일제히 손을 모으고 외친 "파이팅"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었다. 그들의 표정과 자세에서는 깊은 각오와 의지가 엿보였다. 누군가는 농담처럼 “작은 동네 시합”이라 말할지 몰라도, 이 순간만큼은 올림픽 선수들 못지않은 열정이 그곳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아내의 첫 투구를 조용히 지켜봤다. 공이 굴러가는 궤적은 그녀의 오늘 컨디션과 마음 상태를 단번에 보여줬다. 결과와 관계없이 나는 이내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차로 걸어가며 아침에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볼링장 안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코치처럼 옆에서 그녀를 응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계속 지켜보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어제부터 나 자신에게 설득하듯 말해왔던 것처럼, 그녀가 온전히 자신의 경기를 즐길 수 있도록 나는 자리를 비우기로 했다.


차에 올라 어제 읽다 말았던 부자의 언어를 꺼냈다. 조용한 차 안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나를 둘러쌌고, 어느새 이야기에 몰입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생각이 깊어질 무렵, 문득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시가 넘었다.


책을 덮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다시 볼링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마음이 묘하게 떨렸다. 기대와 긴장이 교차하는 그 순간, 아내가 어떤 표정으로 날 맞아줄지 궁금하면서도 조금 두려웠다.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하길, 그리고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그녀가 마음껏 자신의 순간을 만끽했기를 간절히 바라며 볼링장 문을 밀었다.


볼링장 안은 여전히 뜨겁고 생동감이 넘쳤다. 사람들의 환호와 긴장이 뒤섞여 공기마저도 울렁거렸다. 그 안에서 아내를 찾는 내 눈은 어느새 그녀의 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볼링장에 들어섰을 때, 이미 5게임이 종료되고 마지막 게임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점수 현황판을 보니 아내의 이름은 당당히 3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누구보다 꾸준하고 안정적인 경기를 이어온 듯했다. 그리고 지금, 이 마지막 게임만 흔들림 없이 마무리한다면 1위까지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도는 현장이었다. 1위부터 10위까지의 점수 차이가 크지 않았기에, 마지막 게임 하나로 모든 순위가 뒤바뀔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그런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조용히 뒤에서 그녀를 응원했다.


그러나 경기가 진행되면서 아내의 컨디션에 미세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 그녀의 장기였던 안정적인 투구가 갑작스럽게 흔들리는 듯했다. 공은 정확히 1, 3번 포켓에 들어갔지만 스트라이크는 나오지 않았고, 이어지는 스페어 처리마저 놓치는 프레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점점 무거워지는 그녀의 어깨와 깊어지는 표정을 보며 나 역시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마지막 게임의 고비를 끝내 넘지 못했다. 아내의 최종 등수는 7위로 마무리되었다.


점수판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스포츠의 세계는 늘 이런 방식으로 끝을 맺는다.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있고, 마지막 한 순간의 결과가 모든 과정을 뒤바꿔 놓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아내가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느꼈다. 오늘의 경기는 점수로만 판단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아내가 걸어오는 모습에서 실망감도 보였지만, 어딘가 후련한 표정도 함께 엿볼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오늘 정말 잘했어. 결과는 결과일 뿐이고, 당신이 보여준 노력과 열정이 더 중요하잖아. 


다음엔 또 도전하면 되지, 그렇지?”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음엔 더 잘할 거야.” 

우리에게 이 하루는 아쉽지만 또 하나의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노력했던 순간들, 서로를 응원했던 시간들, 그리고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다짐까지. 


시상이 끝나고 평소 같았으면 함께 아쉬움을 술 한잔으로 달래며 늦은 저녁을 먹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금주를 선언한 지 19일째, 그리고 아내도 집에서 조용히 쉬고 싶다는 말에 서로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차로 돌아오는 길, 아내는 여전히 오늘의 경기에 대한 아쉬움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에 정말 잘 들어갔는데, 왜 스트라이크가 안 났을까?”

“그 스페어 커버를 했어야 했는데, 왜 그때 그렇게 실수했지?”


아내는 혼자서 오늘의 경기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녀가 이 과정을 충분히 스스로 받아들일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괜히 “아쉽긴 했지”라든지 “그걸 잡았으면 1등 했을 텐데” 같은 말을 하는 건 절대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 뿐이다.


나는 아내의 독백을 들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말하는 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해 달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건 위로를 요청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하지만 그 위로는 진정성이 담겨야 한다. 어설프거나 가볍게 넘기려는 태도는 오히려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며 마침내 내 의견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간이 찾아왔다.

“자기가 봤을 때는 어땠어? 내가 좀 어이없는 실수를 많이 했지?”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어느새 속상한 마음을 스스로 많이 가라앉힌 상태로 보였다. 이제 내가 할 말은 그녀를 탓하거나 조언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그녀가 겪은 좌절을 충분히 이해하며 다독이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즘 레인이 엉망이더라. 오일 상태가 들쭉날쭉해서 포켓에 잘 들어가도 스트라이크가 잘 안 나오잖아. 

커버도 어려웠고.”


아내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렇지? 요즘 레인이 진짜 엉망이긴 해.”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쐐기를 박았다.

“그런 레인에서 60명 중에 7등을 했으면 정말 잘한 거야. 그리고 당신은 아직 체력이 완벽히 돌아온 것도 아니잖아. 조금만 더 회복되면 아마 당신을 이길 사람은 없을 거야. 오늘 정말 고생했고, 잘했어. 축하해!”


아내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어느새 웃음을 띠며 말했다.

“배고프다. 우리 점심은 뭐 먹지?”


그 말에 나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났다. 그녀가 한결 마음을 정리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의 질문은 무거운 공기를 환기시키는 작은 신호 같았다. 그녀가 경기에서 겪었던 아쉬움은 이제 한 끼의 식사처럼 삶의 일부로 스며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또 일상의 한 장면을 함께 넘긴다.


아내와 나는 차 안에서 짧게 후회와 자책의 시간을 나누었지만, 곧 그것을 발판 삼아 다시 도전하자는 마음으로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었다. 1위는 이루지 못했지만, 60명 중 7위를 차지한 성과는 우리가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우리는 “3위에서 떨어졌다”는 아쉬움이 아닌, “60명 중 7위를 했다”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고, 그렇다고 식사를 거르기에는 배가 출출했다. 결국 집 근처에 있는 칼국수 집으로 향했다. 허름하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칼국수 집은 우리에게 늘 안식 같은 공간이었다.


우리는 칼국수와 잔치국수를 각각 한 그릇씩 주문했다. 그리고 늘 함께 곁들이던 촌 두부도 추가했다. 메뉴는 간단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빠지지 않았던 막걸리는 오늘은 과감히 생략했다. 금주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오늘은 정말 단순히 식사만 하고 싶은 날이었다.


음식이 나오고, 따뜻한 국물의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서로 마주 보며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잔치국수의 맑은 국물과 촌 두부의 고소한 맛이 어쩐지 오늘의 아쉬움과 잔잔히 섞여가는 기분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막걸리를 곁들인 여유로운 대화로 식사를 마무리했겠지만, 오늘은 말 그대로 ‘식사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걸리 없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과거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만족과 여유를 찾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비록 1위는 이루지 못했지만, 오늘 하루는 분명 또 하나의 값진 경험으로 남았다. 실패를 딛고 도전을 다짐하며, 그리고 작은 행복들을 발견하는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볼링 시합이 끝나고 피곤하다던 아내가 배부른 배를 두드리며 느닷없이 산책을 제안했다. 인근의 연꽃 습지를 잠시 걸어보자는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따뜻한 국물로 속을 채운 뒤,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걷는 것은 우리에게 늘 새로운 위로를 안겨주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연꽃 습지를 찾았다. 지난 9월, 추석 무렵에 이곳을 걷고는 약 4개월 만이었다. 그때는 초록의 생기가 가득한 풍경 속에서 연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풍경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누렇게 말라버린 연꽃 줄기들은 제 키를 이기지 못한 듯 중간에서 부러져 있었고, 연못 위에는 얼음이 단단히 얼어 있었다.

그 얼음 위로는 겨울 오리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얼지 않은 작은 물웅덩이를 찾아 그들은 연신 엉덩이를 치켜올리며 물속에 머리를 자맥질하고 있었다. 정적 속에서도 그들만의 시끄러운 몸짓은 묘한 활기를 더했다. 이 겨울 풍경은 가을의 습지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나는 차가운 손을 주머니에 넣었고, 아내는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내 점퍼 주머니에 손을 슬며시 넣었다. 그 작고 차가운 손이 느껴지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작년 봄에는 정말 자주 왔는데, 요즘은 너무 가끔 오는 것 같네,” 

아내가 말했다.


“그러게. 이렇게 풍경이 달라진 걸 보니까 나도 이곳이 조금 낯설게 느껴져.”

나는 답했고,


“날 좀 풀리면 자주 오자. 그래도 여기 나와서 걸었던 기억이 제일 많이 나.”

아내가 말했다.


“그래, 앞으로 우리 자주 나와서 함께 걷자. 나도 이 길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습지 위로 퍼져 있는 겨울 풍경은 차가웠지만, 우리는 그 길 위에서 따뜻함을 나눴다. 누렇게 변한 연꽃 줄기와 얼어붙은 연못 위의 오리들, 그리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우리의 손. 이 모든 것이 오늘 하루를 작은 이야기로 채워갔다.


봄이 오면 이 길은 다시 연초록으로 변하겠지만, 오늘의 겨울 기억은 그 속에서도 선명히 떠오를 것이다. 함께 걷는 길, 그 길 위에서 나눈 약속과 온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곳에 다시 오는 이유가 아닐까.


이 산책로는 아내가 퇴원한 후 재활을 위해 매일 걸었던 곳이었다. 병실의 공기를 벗어나 처음 이 길을 걸을 때,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하고 무거웠다. 아내의 창백한 얼굴, 힘없이 내딛던 발걸음, 그리고 내가 마음속으로 삼켰던 불안과 간절함. 그 모든 순간이 이 길 위에 새겨져 있다.


아내도 나도 이 길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니, 잊을 수 없다. 그때의 모습들은 지금은 사진 속 희미한 장면으로 남아 있지만, 이 풍경은 우리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누렇게 꺾인 연꽃 줄기 속에도, 얼어붙은 연못 밑에 숨은 연근 속에도, 여름이 오면 다시 피어날 연꽃 봉우리 속에도. 그리고 지금 자맥질하며 추운 겨울을 헤쳐나가는 오리들의 눈동자 속에도, 이 겨울의 연못 어딘가에서 동면 중인 개구리의 기억 속에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우뚝한 정자의 그림자 속에도 우리의 모습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 풍경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와 아내는 이 길을 걸을 때마다 그날의 시간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오늘처럼, 그날이 단지 과거의 아픔이 아니라 우리가 극복해낸 현실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며, 지금의 행복에 감사할 것이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바람이 점점 차가워졌다. 바람이 뺨을 스치며 더 추워지기 전에 우리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강한 바람에 살짝 트인 뺨과 꽁꽁 언 손은 따뜻한 집 안의 온기가 간절히 그리워졌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내와 함께 따뜻한 홍차 한 잔을 우려냈다. 손에 쥔 찻잔의 온기가 차가운 손끝을 녹이고, 홍차의 깊은 향이 마음까지 따뜻하게 감싸는 느낌이었다. 차를 마시며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오늘 이 길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내와 내가 함께 걸으며 나눈 대화, 잔잔히 퍼진 추억, 그리고 이 겨울의 고요한 연못. 그것은 단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준 이야기였다. 


저녁이 되어 막내가 돌아왔다.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나누고, 각자만의 시간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나는 책상에 앉아 오늘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펜을 들고 하루를 찬찬히 되돌아보니, 마음속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단 한순간도 불행의 그림자가 내 곁에 머물지 않았던 일요일이었다. 불평도, 불만도, 짜증도, 속상함도 찾아오지 않은 하루. 대신, 따뜻한 순간들이 온종일 나를 감싸주었다. 볼링장에서는 아내의 열정과 도전을 응원하며 웃음을 나눴고, 연꽃 습지에서는 겨울의 고요함 속에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다정한 대화를 나눴다. 함께 걸었던 그 길, 얼어붙은 연못과 꺾인 연꽃 줄기 속에서도 우리는 소중한 추억을 발견했다.


이 모든 시간이 지나고 나서, 지금 이 순간 책상에 앉아 오늘을 기록하며 느낀다. 행복이란 거창하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이런 평범한 하루 속에 숨어 있는 것임을.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또 다른 행복이라는 것을.


오늘의 나는, 그런 행복을 충분히 누렸다. 그런 하루를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참 고맙고 소중하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보석 같은 하루를 가슴 깊이 담으며, 이 감사한 마음을 내일로 고이 이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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