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등하게 시스템을 활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효율성을 가장한 비효율이다.
금주 20일 째, 오늘도 어김없이 루틴을 마치고 책상에 앉았다. 명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목표를 써 내려가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댓글로 내 생각을 남기는 일까지. 이런 작은 루틴들이 쌓이며 내 하루는 조금씩 더 단단해지는 듯하다.
책상에 앉자마자 눈길이 간 것은 주말부터 손에 든 “부자의 언어”였다. 경제와 관련된 책은 언제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담긴 무게가 가볍지 않아서 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시간을 두고 읽기로 마음먹고 주말을 골랐다. 그런 선택이 옳았음을 오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새삼 깨 달았다.
읽는 내내 생각했다. 삶의 언어는 우리가 말로 뱉는 그 순간부터 내 것이 된다. '부자의 언어'라는 제목만 놓고 본다면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이야기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책 속에서 발견한 것은 조금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사람의 태도와 마음가짐, 그리고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가치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들었던 생각은 단순하지만 선명했다. 내가 이 책을 읽을 시간을 이렇게 잘 골라낸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기쁨이었다. 경제적 지식이 쌓이는 것만큼, 시간을 투자하는 방식도 스스로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리라.
존 소포릭의 “부자의 언어”라는 책은 처음엔 경제·경영서라는 표지의 장르 분류 때문에 단순히 재테크와 돈 버는 기술을 알려주는 책일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몇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자, 이 책은 그러한 선입견을 단번에 깨뜨렸다. 이 작품은 단순히 경제적 성공을 넘어 삶의 태도와 철학, 그리고 내면의 성장을 이야기하는 특별한 자기계발서였다.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그 구성이다. 보통의 자기계발서처럼 딱딱한 강의나 나열식 조언이 아닌, 가상의 정원사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정원을 가꾸는 과정 속에 부의 씨앗을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여정을 빗댄 비유는 너무나도 명확하고 아름다웠다. 그 비유 덕분에 나는 부의 여정이 단지 목표 지향적 행동의 연속이 아닌, 마치 정원 가꾸기처럼 정성과 인내가 필요한 과정임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마치 세 권의 다른 책을 동시에 읽는 기분이었다. 하나는 정원사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 또 하나는 저자가 자신만의 여정을 담은 진솔한 에세이, 그리고 마지막은 명언과 조언이 깔끔하게 정리된 가이드북처럼 느껴졌다. 이런 독특한 구성은 책을 끝까지 몰입해서 읽게 만들었다. 단순히 '읽는다'는 행위를 넘어 내 삶과 마음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특히 정원의 비유는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을 울렸다. 씨앗을 심는 일은 작은 행동과 습관을 만드는 과정이고, 정원을 가꾸는 일은 인내와 꾸준함의 상징이었다. 나도 내 삶이라는 정원을 어떻게 가꾸어 왔는지, 앞으로 어떤 씨앗을 심고 싶은 지 돌아보게 되었다. 정원사가 겪는 어려움은 곧 현실에서 내가 마주하는 도전과도 같았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과 태도를 배우는 데 이 책은 훌륭한 스승이 되어주었다.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 점은 이 책이 단순히 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는 삶의 한 부분일 뿐, 진정한 성공은 정신적 성장과 내면의 평화, 그리고 삶의 균형에서 온다고 강조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가 아들에게 전하는 편지는 나 에게도 직접 말을 거는 듯했다. 한 구절, 한 문장이 따뜻한 위로이자 강렬한 동기로 다가왔다.
책을 덮으며, 나는 이 작품을 단지 한 번 읽고 끝낼 책이 아니라 평생 곁에 두고 싶은 지침서로 삼기로 했다. 내가 가꾸는 삶이라는 정원이 언젠가 풍요롭게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이 책의 가르침을 작은 씨앗처럼 매일 실천하며 살고 싶다.
오늘 하루, 책 한 권이 내게 준 깨달음은 너무나도 컸다. 내가 앞으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정원을 만들어가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게 한 하루였다. 이제부터 나도 정성스럽게 나만의 정원을 가꾸는 행복한 정원사가 되어야겠다.
한 권의 책을 끝내고 나면 어김없이 나는 책 위에 손을 얹는다. 따뜻한 표지를 손끝으로 느끼며 방금 읽은 이야기와 문장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시간. 어쩌면 이것은 책과 나만의 작별 의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그렇듯, 너무 좋은 문장들이 스쳐 지나갔다. 기억하려 애썼던 구절들이 어느새 희미해지고, 떠올리려 해도 머릿속 어딘가에 숨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럴 때면 아쉬움과 자책이 찾아온다. 왜 조금 더 깊이 새기지 못했을까? 왜 그 순간 충분히 집중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안도감이 나를 위로한다. 이 책의 내용들은, 비록 지금 당장은 떠오르지 않더라도, 내 안 어딘가에 분명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나는 믿는다. 이 책의 문장과 이야기가 내 잠재의식 속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마치 씨앗처럼, 시간이 흐르고 내가 그 필요성을 깨달을 때, 그 문장들은 거짓말처럼 나를 향해 싹을 틔우고 도움을 줄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은 순간적인 경험일지 모르지만, 그 여운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는다. 비록 내가 모든 문장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것들은 나를 이루는 작은 조각으로 남아 언젠가 내 삶에 빛을 더해줄 것이다. 이 믿음이야 말로 책을 읽는 가장 아름다운 이유가 아닐까.
독서를 마치고 운동을 시작했다. 간단한 팔굽혀펴기를 하고 페달을 밟으며 “하와이 대저책”의 영상을 시청했다. 오늘은 지난주말에 연장선에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에 대한 영상 마무리했다.
“인간을 이루는 것과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
이 두가지 자산에 대한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장소는 당신의 의식 내부다.
반면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은 타인의 눈에 비친 표상이며,
그게 벌어지는 장소는 당신이 아닌 타인의 의식이다.”
하와이 대저택<쇼펜하우어>
페달을 밟는 동안, 땀방울만큼이나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매일 쓰는 블로그와 브런치 글, 그 글들이 정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묻게 되는 시간이었다. 결국, 글을 쓰는 목적이 명확하지 않으면 내가 쓰는 글이 타인과의 공감을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의식하며 쓰는 글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타인을 의식한 글쓰기는 치명적인 함정을 숨기고 있다.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 한계를 넘기 위해 무언가를 덧붙이다 보면 진실이 왜곡되거나 얄팍한 지식 위에 거짓을 쌓아 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글은 내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욕망을 따라가는 도구가 되고, 결국 그런 글은 힘을 잃는다. 습관처럼 그렇게 쓰다 보면 글쓰기 자체에 염증을 느끼고, 더 이상 펜을 들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요즘 나도 모르게 하트와 라이킷 같은 숫자들에 신경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눈에 보이는 그 붉은 하트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문득 깨닫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내 글을 읽고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운동을 마치고 청소를 시작하며 다짐해본다. 나는 내 글을 통해 타인에게 진심 어린 공감을 전달하고 싶다. 그렇다면, 내 목적은 분명해야 한다. 숫자로 증명되지 않는 진심, 보여지는 결과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 목소리가 진정성을 가지도록.
땀과 함께 흘려 보낸 생각들은 가볍지 않았다. 그만큼 내 마음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글쓰기가 나 에게도, 내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진정한 힘을 주기 위해서 나는 오늘,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청소를 마치고 잠시 외출할 일이 생겨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출입문을 지나던 그 순간, 나무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목련이었다. 앙상한 가지 끝마다 작은 봉우리가 맺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봉우리들은 새끼손가락만큼 부풀어 올라 있었다. 목련은 이제 꽃을 피우기 위해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자연스레 휴대폰을 꺼내 달력을 확인했다. 오늘은 절기상 “대한”, 가장 추운 날로 알려진 시기였다. 하지만 오늘의 날씨는 그 말과는 다르게 포근했다. 문득 며칠 전 “소한”에 살을 에는 추위를 겪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교해보면 오늘은 한층 따뜻했다. 겨울이 완전히 물러가려면 아직 꽃샘추위가 몇 번은 더 찾아오겠지만, 목련은 이미 봄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작년 이맘때의 겨울을 떠올렸다. 아내와 함께 혹한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 목표였던 시간들. 내일을 기대하기보다는, 오늘만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보냈던 겨울이었다. 그러나 이번 겨울은 다르다. 여전히 차갑고 매서운 날씨지만, 나는 내일이 보이는 겨울을 살고 있다. 이 작은 차이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느끼며 목련 봉우리 앞에 멈춰 섰다.
곧 목련은 굵고 큰 꽃잎을 피워내고, 이어 커다란 잎사귀를 만들어내며 봄을 완성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며 나는 내 인생의 봄 또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내년 이맘때, 다시 목련이 꽃을 피울 무렵에는 내가 간절히 꿈꾸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잠시 목련나무를 올려다보며 하늘을 바라본다. 봉우리 하나하나가 기다림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련이 이토록 단단하게 봄을 준비하듯, 나도 내 삶의 봄을 위해 천천히 준비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계절은 흘러가고, 나 또한 앞으로 나아간다.
오늘의 외출은 의도치 않게 공공시설 순례가 되어버렸다. 은행, 병원, 우체국, 주민센터까지 네 군데를 도는 동안 쉴 틈이 없었다. 병원은 관공서가 아니니 엄밀히 말하면 공공시설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결국 모든 장소가 공적인 목적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간이었다. 어디 하나 한가한 곳이 없었다.
은행은 자동화 덕분에 직원 수가 줄어든 탓인지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섰고, 병원은 독감 환자로 가득 차 대기 번호를 받은 사람만 서른 명이 넘었다. 우체국에서는 설 명절을 앞두고 선물 꾸러미를 보내려는 사람들로 복도까지 북적였다. 그나마 주민센터가 조금은 한산한 편이었지만, 그조차도 느긋하게 볼 틈은 없었다.
이렇게 네 군데를 다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두 시간. 모두 집에서 도보로 10분 내외 거리에 있는 곳들이었기에 쉽게 생각했는데, 웬걸, 지친 몸으로 문을 열며 "오늘은 정말 고단한 하루였다"는 말을 저절로 내뱉게 되었다.
게다가, "대한"이라 덜 춥다고 얇게 입고 나온 것도 실수였다. 날씨가 포근하다고 방심했지만, 찬바람은 얇은 옷을 뚫고 스며들었다. 그 순간, "대한"이라는 이름이 왜 추운 절기를 뜻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대한"을 얕잡아 본 탓에 결국 내가 이 추위에 무릎을 꿇은 셈이다.
오늘의 외출은 단순한 일상의 일정 같았지만, 그 안에서 의외의 교훈을 얻었다. 계획은 단순해 보일수록 허투루 대하지 말아야 하고, 절기는 이름 그대로의 의미를 품고 있다는 것. "대한"이 보내는 마지막 찬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집 안의 따뜻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되새기게 되는 하루였다.
차 한 잔을 우려 소파에 앉아, 오늘 하루 동안 방문했던 장소들을 떠올려본다. 네 곳 모두에서 내가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은 같았다. 번호표를 뽑는 것. 출입구를 들어서면 자동으로 손이 번호표 발급기로 향한다. 작은 종이 한 장을 손에 들고, 나와 같은 종이를 쥔 사람들이 대기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다. 모두들 고개를 숙인 채, 숫자판에 자신의 번호가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광경 속에서 이상한 점은 늘 보인다. 대기줄은 끝이 없는데, 빈 창구가 간간이 눈에 띄는 것이다. 자동화와 효율화가 직원 수를 줄였기 때문이리라 생각하며, 납득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 앞을 지날 때면 마음이 편치 않다. 간단한 질문 하나만 하려고 창구에 다가가면, 대기 중인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다. 동시에,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는 직원의 분주한 모습에 죄책감마저 든다. 결국 발걸음을 돌려 자리에 앉아 다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가장 미스터리한 순간은, 내가 대기 중일 때 꼭 내 바로 앞 번호의 사람이 상담하는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질 때다. 그 사람의 업무가 복잡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기다림이 더없이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정작 내 번호가 숫자판에 뜨고 창구에 도달하면, 업무는 단 몇 분 만에 끝나버린다. 긴 기다림에 비하면 억울한 기분이 들 정도로 짧고 허무한 순간이다.
그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괜히 창구 직원에게 불필요한 질문이라도 해볼까 하는 유혹이 든다. 하지만 그럴 용기는 나지 않는다. 이미 내 뒤에서 대기 중인 아주머니가 내 뒷모습을 강렬한 눈빛으로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선은 마치 "당신 때문에 내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나는 종이표와 함께 기다림 속에서 또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간다.
이 작은 번호표 한 장이 만들어내는 풍경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기다림과 효율성 사이에 놓인 우리의 일상이 가진 아이러니다. 길게 느껴지는 대기와 짧은 순간의 처리, 그리고 그 속에서 쌓이는 무언의 교감. 이 모든 것이 작은 종이 한 장에 얽힌 우리의 삶이다.
오늘 내가 이 이야기를 길게 적는 이유는 단순히 대기 줄에 대한 불만 때문이 아니다. 자동화라는 이름 아래 허무하게 낭비되는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나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말하고 싶어서다. 오늘 처리한 업무는 사실 인터넷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한 번에 해결하려는 마음, 그리고 오랜만에 바람을 쐬고 싶다는 안일한 생각이 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긴 대기와 고단한 발걸음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이 불편함은 인터넷 환경이 익숙한 사람으로서조차 겪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 기다림이 얼마나 더 힘겹게 다가올까. 그들에게 공공시설의 자동화 시스템은 빠르고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더 많은 시간을 빼앗는 벽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도입된 자동화는, 역설적으로 누군가의 시간을 더 많이 낭비하게 만들고 있었다. 빈 창구 앞에서 느꼈던 공허함은 단순히 줄을 서서 기다린 시간이 아니라, 인간적인 접촉이 사라지면서 잃어버린 소통과 신뢰감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점점 디지털화되고, 세상은 빠르게 변화해간다. 이러한 변화가 긍정적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그러나 한쪽의 편의를 위해 다른 쪽의 시간을 희생하는 구조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시스템을 활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효율성을 가장한 비효율일 뿐이다.
결국, 세상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완성되는 일들이 여전히 많다. 기술은 보조 도구일 뿐, 그 본질은 인간적인 연결을 돕는 데 있어야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것이 반드시 더 나은 것은 아니다. 내가 느낀 작은 불편함은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더 큰 어려움일 수 있다.
소파에서 일어나며, 나는 바랐다. 미래는 단지 속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속도와 사람 사이의 균형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기술이 사람을 위한 것이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이라면, 효율 속에서도 여유와 배려를 잃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저녁 메뉴는 김치찌개와 구운 김으로 간단히 정했다. 쌀을 씻고 쌀뜨물을 냄비에 붓는다. 묵은지 하나와 며칠 전 이마트에서 사온 등갈비 목살을 넣어 끓이기만 하면 완성. 제작년에 담가둔 묵은지는 별다른 간을 하지 않아도 깊고 풍부한 맛을 내준다. 이렇게 손쉽게 차려진 저녁 한 끼는 언제나 그렇듯 따뜻하고 만족스러웠다.
배부른 저녁을 먹고 시계를 보니 6시 20분. 7시까지는 아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소파에 앉아 TV를 켜니 모든 채널에서 어젯밤 법원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었다. 각자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주장하는 모습들이 조금 피로하게 다가왔다. 결국 채널을 돌리고 돌리다가 호주오픈 테니스 대회에 멈췄다.
테니스는 예전에 즐겨보던 스포츠였지만, 최근에는 거의 접하지 않았다. 기억 속 테니스 선수라면 나달과 조코비치 정도. 그런데 지금 세계 랭킹 1위는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16강 명단을 보니 조코비치와 메드베데프 같은 익숙한 이름도 있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낯선 선수들. 테니스도 어느새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모양이다.
아는 선수가 있다면 응원하는 재미라도 느꼈을 텐데, 이름 모를 선수들끼리의 경기는 그저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7시가 되자 TV를 끄고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책상 앞에 앉아 오늘의 마지막 시간을 정리한다. “부자의 언어”에 대한 블로그 글을 작성하며, 오늘 하루를 곱씹어본다. 아침부터 공공시설을 돌며 느낀 기다림과 비효율성, 소소하지만 고단했던 일상 속 생각들. 그리고 저녁을 함께 보낸 아내와의 대화와 조용히 지나간 테니스 경기까지.
긴 듯 짧았던 하루가 이렇게 또 마무리된다. 찰나 같으면서도 깊이 남는 하루의 조각들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 조각들을 이렇게 글로 옮기며, 나는 오늘도 조금씩 나를 더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