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가 되고 싶었던 또 다른 나였을지도 모른다.
금주 22일 째, 계획된 생활대로 루틴을 진행하고 책상에 앉아 어제 볼링장에서 읽다 잠시 덮어 둔 책, 임경선 작가의 <다 하지 못한 말>을 읽었다. 이제 임경선작가는 나에게 글 을 쓰는 과정의 멘토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녀의 필체에서 나오는 건조함을 나는 좋아한다.
이 소설은 단순히 사랑의 끝을 그린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고, 끝내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삶과 사랑의 본질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작품이었다. 책장을 덮은 후에도 내 마음속에는 질문들이 남았다.
주인공 ‘나’는 안정적이고 정형화된 삶을 살아가는 공무원이다. 그녀의 세계는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다. 내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그 속에서 나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녀의 연인 ‘그’는 달랐다. 그는 피아니스트였고, 자유롭고 감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갈망하며 움직였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도 조금은 나 자신을 본 듯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되고 싶었던 또 다른 나였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차이에 매료되어 사랑을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열정적인 삶에 반했고, 그는 그녀의 차분하고 안정된 모습에서 위안을 찾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차이는 매력에서 벗어나 균열로 변했다. 그녀는 그의 자유분방함과 이기적인 사랑의 방식이 불편했고, 그는 그녀의 다가오는 사랑의 방식이 불편했다.
결국 그는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아니 어느 유행가의 제목처럼 아무런 감정 없이 “이별이 아닌 이별”의 말을 건네는 그에게 그녀는 상처받는다. 그리고 나는 그 장면에서 멈칫했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멀어지고 상처를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단순히 이별의 슬픔만을 말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삶의 방향성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지를 묻는다. 내 삶을 돌아보니, 나도 정형화된 틀 속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편이다. 때로는 그 안정감이 나를 편안하게 하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하는 느낌이 든다.
반대로, 자유롭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과 가까워질 때면 설렘을 느끼지만, 끝내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이건 어쩌면 삶이 가진 구조적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고도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이 있다. “정말, 서로 다른 삶의 속도를 가진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을까?” 사랑으로 모든 차이를 넘어설 수 있다는 말은 어쩌면 단순한 위로일 뿐일까? 아니면, 그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우리는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
나는 아직 답을 모른다. 아마 평생을 살아가며 조금씩 찾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느낀 감정만은 선명하다. 사랑이란, 그리고 삶이란 어쩌면 우리가 끝내 다 하지 못할 말들로 가득 차 있는 여백일지도 모른다. 그 여백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생각해 보는 것도 어쩌면 인생의 행복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을 덮고 두 손을 얹으며 생각했다. 역시, 임경선 작가의 필체는 나를 설레게 한다. 그녀의 문장은 단순한 단어와 문장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마치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 갑작스레 나타난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아시스는 사막이 아닌 정글이나 숲속에 있다면 그저 작은 연못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황량하고 삭막하며 숨조차 마르듯 건조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는 단순한 연못이 아니라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쏟아지는 폭포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갈증을 풀어줄 유일한 존재, 우리의 눈과 마음을 다시 열어주는 경이로움 말이다.
임경선 작가의 필체가 바로 그런 존재다. 메마른 일상 속에서 그녀의 문장은 나에게 시원한 계곡의 폭포수를 연상케 한다. 시원하고 강렬하게 다가오는 그 감각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서 나를 자극하고 각성시킨다. 잊고 있던 감정을 다시 끌어올리고, 내 마음속 깊은 곳을 흔드는 그 힘이야말로 그녀의 글이 가진 매력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느낀다. 나는 그녀의 이런 필체가 정말 좋다. 단순히 아름답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닫힌 마음을 열고, 막혀 있던 생각에 물길을 터주기 때문이다. 그 시원한 흐름 속에서 나는 비로소 숨을 깊이 들이쉴 수 있다. 오늘도 나는 그녀의 글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고, 그 물결 속에 스며드는 나 자신을 느꼈다.
하브 에커의 <백만장자 시크릿>에 관한 내용을 시청했다.
오늘 내용에서 기억에 남는 문장을 정리하며 운동을 마쳤다.
“나는 그 변덕스러운 패턴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거로부터 형성된 나의 프로그래밍을 다시 세팅했다.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소득이 증가하는 지점으로 나를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지금도 상황이 잘 돌아간다 싶으면 예전의 나쁜 버릇,
그러니까 성공을 일부러 방해하려는 충동이 가끔씩 고개를 쳐든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을 파악하고 그 충동에게 이렇게 충고할 뿐이다.
‘응, 알았어. 알려줘서 고맙다. 고마운데,’
이제 정신차리고 다시 일하자’
"하와이 대저택"
책의 저자 하브 에커는 자신이 유년시절 아버지로부터 들은 부정적인 말들로 인해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부정적인 생각들로 인해 더 큰 성공으로 가는 길목에서 늘 앞서 나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생각들을 고쳐 나가며 부를 끌어당기는 17가지 원칙을 책으로 써낸 저자라고 했다.
그 내용은 나에게 단순한 볼거리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언젠가는 반드시 읽어야 할 지침서라고 느끼며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마치 그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메시지처럼, 내가 준비되었을 때 펼쳐질 답안처럼 여겨졌다. 아직 책장을 넘겨보지도 않았지만, 책의 무게감이 벌써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는 듯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3시. 정해두었던 생활 루틴을 마무리하고 나니 마음속에서 잠시 느슨함을 허락하고 싶었다. 소파에 몸을 기대어 커피 한 잔을 손에 들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커피였다. 따뜻한 향이 코끝을 간질이고, 입안에 퍼지는 쓴맛이 묘하게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다.
잠시 생각했다. TV를 켤까? 그러나 이내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굳이 화면 속의 혼란을 확인하지 않아도, 어떤 뉴스가 오늘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는지는 이미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언제나 분주하고, 대체로 시끄럽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항상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태풍 한가운데에 있다. 거대한 파도와 바람이 우리의 일상과 정신을 흔들어 놓고 있지만, 이 태풍은 쉽게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사건과 뉴스들은 태풍의 위력을 잠 재우기는 커녕, 오히려 그 소용돌이를 더 크게 만드는 듯하다.
만약 이 태풍을 잠재울 수 있는 무언가 가 나타난다면, 그것이 좋은 소식일 가능성보다는 더 큰 악재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저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어제는 미국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했다. 이제 그들은 거대한 자본의 힘을 앞세워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자국 이기주의를 앞세운 정책들을 빠르게 밀어붙일 것이다. 그 거대한 변화의 중심에서 우리는 어떤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까.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대안을 만들어낼 힘이 충분히 준비된 상태가 아닌 듯 보인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문제를 넘어, 우리 국민들 모두에게 불안을 안겨주는 이유가 되고 있다.
물론 이 혼란 속에서도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대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노력은 결코 가볍게 여겨질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태풍의 중심에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태풍은 더 커다란 위세로 우리를 집어삼킬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태풍도 결국에는 지나갈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자연재해나 인재(人災)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멈춘다. 문제는 태풍이 지나간 자리다. 그곳엔 항상 쓰라린 상처와 고통이 남는다.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어김없이 국민들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지금의 태풍이 하루빨리 잦아들기를, 그리고 더 큰 피해를 남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대한민국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날이 속히 오길 기원하는 마음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이 모든 생각은 소파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스쳐 지나갔다. TV를 켜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화면 속에서 쏟아지는 소음과 논란들 속에서는 이런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TV를 켜지 않기로 했다. 조용한 이 시간이, 적어도 내게는 태풍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피난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며칠 전, 집에 묵은지가 떨어져 어머니께 부탁드렸던 것이 오늘 도착했다. 2년 된 묵은지라니, 그 맛은 상상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박스를 열었을 때 나는 그저 김치만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의 손길은 늘 나의 예상을 훌쩍 넘어섰다. 묵은지뿐만 아니라 생굴, 홍어무침, 김, 사골국물까지. 커다란 아이스박스는 그야말로 어머니의 사랑으로 가득 찬 작은 보물 창고 같았다.
음식 하나하나를 꺼내며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을 느끼는 순간, 마음이 뭉클해졌다. 자주 전화를 드리지도 못하고, 필요할 때에만 연락하는 부족한 자식을 위해 이렇게까지 애쓰시는 어머니를 떠올리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도 어느덧 나이를 먹으며 마음은 점점 여려지는 것일까. 사소한 일에도 눈이 쉽게 붉어지고, 앞이 흐릿해지는 요즘이다.
'루테인이라도 챙겨 먹어야 하나’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났다.
곧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바쁜 와중에도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이 많은 것을 준비해 보내주신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감사함을 전했다. 하지만 그 감사함이 충분히 전달되었을지 모르겠다. 사랑은 항상 표현보다 더 깊고 무거운 것이기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들이 내 안에 쌓였다.
저녁이 되자 아내와 막내가 퇴근 후 식탁 앞에 앉았다. 갑작스레 차려진 어머니표 진수성찬에 모두가 감탄했다. 묵은지로 만든 찌개와 생굴 무침, 홍어회는 입안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우리의 젓가락은 또다시 음식을 향했다. 왕성한 식욕으로 음식을 먹어 치우는 우리를 보며 아내는 웃었다. 그리고 아내도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그 감사의 마음을 자신의 목소리로 전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식사를 마친 후, 아내는 차 한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아 호주오픈 테니스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서재로 들어와 일기를 쓰며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어머니의 사랑이 가득 담긴 음식들이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가족과 함께 나눈 식사가 나를 따뜻하게 만든 하루였다. 그리고 문득 떠올린다.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나는 어머니께 얼마나 돌려드리고 있는지.
책장을 넘기며 오늘 하루의 생각들을 정리한다. 책 속의 단어들은 또다시 내게 질문을 던진다. 어머니가 보내주신 그 묵은지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오래된 진심과 사랑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을 품으며 오늘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