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일 년에 두 차례정도 서울 모처에서 관련업계 사람들과 조찬모임을 갖는다.
어느 날은 모임에 인지심리학자로 유명한 아주대학교 김경일 교수님께서 강연자로 나오셨는데 만남이 인상적이었는지 이후로 팬이 되었다. 처음에는 '인사고과 점수가 깎이지 않기 위해'참여했다면 지금은 조화를 이룬 것 같다.
"엄마~ 나 내일 조찬모임이 있어"
올해 중3이 되는 큰 딸이 겨울방학이 막 시작된 어느 날 저녁을 먹으면서 말한다.
(조찬모임이라니..ㅋㅋㅋ)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가지고~)
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거창한단어가 귀여워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아이의 약속은
내일 아침 7시 40분쯤 친구를 만나
상황과 기분을 봐서 24시간 하는 국밥집에서 설렁탕 한 그릇을 먹거나 편의점에서 아침을 먹은 뒤 인근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휙 돌고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oh my baby! 너희 너무 귀엽다 딸들아!
다음날 아침 진작에 알람이 울렸고 8시가 넘었는데도 아이가 방에서 나오지 않길래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더니 이불속에서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들린다.
딸 : 응 나도 너무 졸려
수화기너머 친구 : (블라블라) 들리지 않음
딸: 어떡하지
수화기너머친구:(블라블라)
딸: 그럼 내일은 진짜 만나자.
수화기너머친구:(블라블라)
막상 일어나려니 겨울날 따뜻한 이불의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는지 몇 시간 동안 수다를 떨면서 세운 계획이 무색하게 아이들의 첫 번째 조찬모임은 단 몇 마디로 쉽게 무산되었다.
이와 똑같은 상황은 그 후로 5번이 넘도록 반복되었다.
매일 저녁 약속을 잡고
다음날 아침이면 너무 졸려, 도저히 못 일어나겠어, 내일은 진짜로 만나자~며 약속을 취소하는 귀염둥이들. 꼬박꼬박 전화통화하는 걸 잊지 않는 10대의 의리가 싱그러웠다.
이제 나도 슬슬 아침에 깨워주는 일을 멈추어 가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는 아이 방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이내 얼굴에 함박웃음을 띈 딸이 방문을 열고 나온다.
나: 아침부터 무슨 좋은 일이 있어?
딸: 응 엄마. 또 전화통화하다가 우리 이러다 개학날 아침에나 만나겠다고 얘기가 나왔는데 그 말이 너무 웃겨서.. 큭 컥 컥컥킁킁ㅋㅋㅋㅋㅋ
이팔청춘 십 대 소녀는 바람에 낙엽만 굴러가도 그렇게 재미있다고 했던가. 돼지 울음소리를 내며 웃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덩달아 한바탕 웃었다.
무엇이 너희들을 영하 6도의 아침에 맞이하는 따뜻한 이불속을 박차고 일어나게 했는가 했더니 '재미'였구나!
너처럼 숨넘어가게 재미있다고 느껴본 일이 언제였을까?
돌아보면 나의 2030 시절에는 '재미'에도 효율과 성과를 따졌던 것 같다. 무엇을 하기에 앞서서 이 행위가 유익한 무언가를 남기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 대답이 명확할수록 만족도가 높았다. 아니, 만족도가 높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멋진 남자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가 훨씬 재미있으면서도 웬만하면 사회 경제 교양 프로그램은 챙겨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런 생각이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 나 자신에게 속아 넘어갔다.
전업주부였지만 '회사 가는 것'을 제외하고 많은 일을 감당하면서 살다 보니 우습게도 '번아웃'이 찾아왔다. 충분한 휴식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생활의 영향으로 회복이 더디었다.
정말로 의욕이 하나도 없었던 그때 겨우 찾아낸 하고 싶은 일은 세 가지뿐이었다.
1. 늦잠자기-그래봐야 아이들 학교 보내야 하니 아침 7시가 게으름 최대치다.
2. 살림 포함 아무것도 안 하기
3. 혼자 있기
혼자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 아무 일정도 없는 나른한 하루를 보내 본 적이 없는 내가 서글프고 애달프게 느껴졌다.
어느 일요일 하루쯤은 남편이 식구들 아침밥 한번 챙길 법도 한데, 친정엄마도 와서 밥 한 끼 먹고 가라고 하실 법도 한데, 내가 이렇게 손이 필요한 순간에는 항상 없지, 도무지 나는 무생물과 살고 있는 기분이라며 괜히 남편과 엄마를 탓했다.
"여보 내일은 아이들하고 밖에서 아침식사 하고 올래?"
휴식시간을 확보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불편한 감정을 담고 있는 동안은 이토록 쉬운 해결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감정의 회오리 속에서 한참을 웅크린 뒤에야 잠잠해진 감정들 사이로 이성이 다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밥 먹는 시간보다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각자 인생의 시계가 다르고,
한창나이 40대인 지금의 나는 아직 물리적 여유를 갈망하기보다는 힘을 내야 하는 시기라는 것을 안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지 않도록 지혜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백발머리 휘날리면서
조용하고 한적한 카페에 앉아
책 읽고, 일기 쓰는 일상이 자연스러워지는 때가 오겠지.
아, 그러려면 건강한 몸으로 커피 값은 벌어야 할 텐데
뭘 해서 돈을 벌지?
그래 일단은 공부를 하자.
더도 말고 하루에 딱 두 시간만,
그러려면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서.......
결국 이렇게 현재의 나로 돌아온다.
삼재를 살아가는 오늘의 생각_5)
왜 이렇게 살고 있나 싶다가도 알고 보면 나답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울적한 마음은 짧게 가져가려고요!
울적함 싹둑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