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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고백하러 갑니다(수줍)

by 진아름

'오지 마 오지 마 나한테 오지 마!!!

난 그냥 음악이나 맘껏 들으면서 리듬에 몸을 맡기러 온 것뿐이야. 제발 그냥 지나가줘.'


maroon5 memorise비트에 맞추어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

정수리에 줄이 매달린 마리오네트인형처럼 정방향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며 사뿐히 날아온 그녀는 속근육이 단단한 발레 전공자답게 나의 허리에서 한 뼘 떨어진 위치에 정확하게 착지했다.


"회원님, 왼쪽하고 오른쪽 최대한 균형 맞춰서어~ 자 한 번 갈게요~~ 꾹~~"

"으악 억 억 억 선생님...."

"조금만 더어~~ 살짝~~"

기암소리 마저 꿀꺽 삼키고 눈물이 찔끔 고인뒤에야 그녀는 손길을 멈추었다. 살짝이라는 표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정말 잘~하셨어요! 우리 회원님 최고예요!"

내 등을 두 번 쓱쓱 문지르고 다른 회원에게 다리 찢기의 고통을 선물하러 새처럼 날아간다.

아, 예쁜 그녀는 파랑새나 카나리아가 아니라 독수리였구나..

찰나의 순간에 눈이 마주친다. '이 정도로는 죽지 않아요. 저를 믿으셔야 해요'라고 말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 가득 찬 자기 확신과 나를 1mm만큼 성장시키고야 말겠다는 결의. 어쩐지 등을 쓸어주던 손길이 따뜻했어..

그래도 눈을 또 마주치는 건 안돼.

'반대쪽으로 한번 더~' 괜한 보너스의 기회 얻고 싶지 않아.


선생님을 스포츠센터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만난 지도 벌써 2년 정도 되었다. 수강신청과 출석부를 통해 서로의 이름은 알지만 '선생님'과 '회원님'앞에 붙여본 적은 없다.


그동안 우리가 나눈 말은

"안녕하세요"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도인데 대화라기보다는 인사라고 하는 게 맞다.


선생님의 취향이 반영된 음악에 매트필라테스 응용동작으로 구성된 이 수업은 매우 흥미롭다. 박자에 맞추어 깔끔하게 해내기만 하면 마치 한바탕 군무를 춘 것처럼 경쾌한 기분이 든다. 회원들의 박자감각에 따라 자연스럽게 앞뒷줄로 도열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자리 텃새 같은 구시대적 질서는 처음부터 없었다.


나는 무엇을 새로 시작할 때 타당성 검증을 꽤 오랫동안 하는 편이다.

'지금 이어야만 하는가?'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함으로써 포기되는 것은 없는가?'

'효용이 확인될 때까지 지속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가?'


이러한 과정은 실제로 어떤 일에 대한 실패를 줄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일단 한번 즐겨보자'의 여유로움 대신 긴장된 채로 시작하다 보니 내 모습은 흡사 '병풍'같다.

그것도 한자가 가득 적힌 12폭 규모정도?


그러다 보니 좀 특이하다거나, 과도하게 진지하다거나, 무슨 대단한 커리어 여성인 줄 알았다는 약간의 조롱 섞인 뒷말을 들은 적도 있다.

나름대로 단단히 마음먹고 시작한 일에서 이런 소리를 듣게 될 때는 그야말로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이 수업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마음속 항아리를 비운채 두 번째 줄 맨 끝에서 12폭 한자 병풍처럼 서 있었다. 여기서 마음속 항아리를 비웠다는 의미는 혹시 모를 불편함이 상처가 되지 않도록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밝은 에너지 한 스푼을 채운다.

신나는 음악에 흥미도 한 스푼 추가된다.

선생님의 훌륭한 실력에 신뢰가 한 스푼,

새벽 6시 30분부터 열심히 수업하시는 모습에 파이팅도 한 스푼 담아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업은 점점 더 좋아졌다.

마음속 항아리에 긍정의 기운이 채워질수록 긴장이 풀린 자리에 즐거움이 자리 잡았다.

일 년 즈음 지났을 때는 월, 수, 금요일에 맞물린 공휴일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느 날, 수업을 함께 듣는 회원들께서 나에게 앞줄로 가라고 등을 떠밀어 주신다. 떠밀어 줄 때 떠밀려 가는 게 병풍의 소임 아니겠나..


"여기 회원님은 같은 동작을 해도 참 예쁘잖아~~"


어머머머머머머, 여기 신남 열바가지 추가요!!!!!!


물이 들어가듯 조금씩, 서로 나누는 인사에 반가움이 짙어지고 머무는 눈길에서 다정함이 느껴진다.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다른 영역인데 나의 경우는 항아리가 가득 차 애쓰지 않아도 흘러넘쳐야 편안해진다.

내가 선생님을 많이 좋아하면서도 아직 "은주선생님"이라고 친근하게 부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난 샤이한 아줌마인 데다가 튀고 싶지도 않고, 우리의 항아리는 아직 흘러 넘칠 만큼 가득 차지 않았다.


오늘은 올해 스물다섯 살이 된 여배우의 자살 소식이 뉴스 1면을 장식했다. 최근 그녀가 받은 스포트라이트는 배우로서의 삶에 긍지를 가질만한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마음속 항아리에 절망을 한 스푼씩 담았을 것이다. 채우다 채우다 흘러넘쳐 오늘의 결말에 이르렀을 고통의 시간에 위로를 보내고 싶다.


내가 은선생님을 응원하듯이 세상에는 나의 안녕을 응원하는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그저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기에 바빠서, 귀찮거나 필요성을 못 느껴서, 무뚝뚝한 성격 등의 이유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오늘 세상을 떠난 그녀에게도 아직 닿지 않은 응원이 있었다는 걸 어린 여배우는 알았을까?



마음이 조금 더 빨리 흘러넘칠 수 있도록 항아리의 크기를 줄여야겠다.


'이 수업 덕분에 생활에 활력이 생겼어요.

체력 좋아져서 하루가 25시간으로 늘어난 것만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내 마음을 담아..


"주말 잘 보내셨어요?(왕 싱긋)"


노랑이 어울리는 그녀




삼재를 살아가는 오늘의 생각_ 6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속에서 낮게 깔린 경고가 느껴진다.


이건 어떨까?

'되돌려 받고 싶은 만큼 뿌려라' 훨씬 안전하게 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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