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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이 다른 그녀

by 진아름

[ 보통의 새벽 1시 ]


투명한 유리비커에 축축하게 젖은 진흙을

절반정도 담아두고 그 위에 맑은 물을 부었다.

뜬 물을 퍼먹으며 그럭저럭 생을 이어간다.

작은 주머니 칼을 찬 그가 나에게 다가와

얇은 손톱으로 밑바닥의 진흙을 긁어낸다.

살며시, 작은 몸짓이었다.


비커가 순식간에 흙탕물 변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깜깜한 밤이니까 더 그렇겠지.


대낮에

집안일을 마친 후에,

운동도 다녀와서

계획된 공부도 마친 다음에,

정오의 햇빛이 내 마음 구석구석에 양분을 전달하며 나를 다독거릴 때

흙탕물이 가라앉는 모습을 바라보기로 하고

눈에 띄지 않도록 한쪽 구석으로 미루어둔다.


지금은 어지럽다.


이건 다 세로토닌 불균형 때문이야.




[ 보통의 오후 1시 ]


결혼 한지 15년 정도 되었는데도 변함없이 남편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솔직하게 손 좀 들어보자.


남편과는 서로 생존소식정도 공유하지만

애들한테 아빠는 필요하니까 같이 산다는 사람 있으면

그것도 솔직하게 손 좀 들어보자.


음. 모두의 의견 잘 알았.. 다ㅎ


모 남성 연예인의 일탈이 대서특필 되었던 어느 날

남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여보, 살다가 꽃뱀을 만나잖아.

화 안 낼 테니까 나한테 데려와"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어떻게 화가 안 나겠어?"

남편의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반응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건 진심이다.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생겼는데 내연녀와 남편이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내연녀에게 조금은 고마운 마음도 들 것 같다. 그에게 나로는 부족했던 위로가 되어주는 순간도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만약 내연녀가 꽃뱀이라면,

이 언니는 평소에 입단속을 잘하지만 생각보다 욕을 잘한다. 일단 여인에게 청력 테스트의 기회가 주어질 거고 처벌은 남편이 원하는 대로 할 것 같다. 남편은.. 피해자니까 심리치료까지 야무지게 챙겨줘야지.

애들한테 아빠는 필요하니까.


멜로드라마의 여리여리한 여주인공이었던 나는

결혼 생활 15년 만에전쟁 속에서도 그 구하기 위해 전장으로 나아가는 전우 1 배역 차지했다.




[ 새로운 시작 ]


아이를 낳고 14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과 단둘이 저녁 외출을 했다.

공연장은 서울 광화문 근처의 세종문화회관이다.

우리 부부에게는 특별한 외출인데 이상하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공연 전 날, 광화문부터 시청까지 신고된 집회인원만 6만여 명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순간 번거로운 마음이 확 일어났다.

"교통이 엄청 복잡할 것 같은데.. 그냥 가지 말까?"


큰 비용을 지불하고 예매한 공연이었지만 망설여졌다.

표시 나는 것 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 (여유롭게) 공연을 보고 싶은 마음이 나에겐 제일 앞에 있었다.

14년 만에 갖는 둘만의 시간 흡족한 기억으로 남기고 싶었기에' 이런 건 내가 원한게 아니다' 쪽으로 마음의 저울추가 30%를 넘어 40%를 향해간다.



남편은 이미 이 소식을 알고 있었고

집회 행진 구간을 피해서 도보 15분 이내에 주차할 만한 장소까지 찾아 둔 상태였다.

세종문화회관으로 걸어오는 도중에 들를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무(無) 맛 음식점도 찾아 놓았다.


나는 조미료나 간이 세지 않은 음식을 좋아하는데

남편은 그런 음식을 '무(無) 맛음식'이라고 부른다.

요리프로그램에도 소개된 적 있는 유명한 식당이었다.


그때 내 마음의 저울추가 49%를 넘어갈락 말락 하던 차였는데, 남편의 말은 단박에 0% 지점으로 나를 데려다 놓으며 기대를 갖게 했다.


겨울밤 단 둘이

손을 맞잡고

기대에 부풀어 공연을 보러 가는 길..

어머!

이거.. 혹시 '데이트'라고 불린다는

그 유명한 '딴 나라 문화유산'인가? @.@


내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운데, 남편 손은 따뜻하다.

핫팩이 필요 없다.

나는 길 눈이 까막눈인데, 남편은 길눈이 무척 밝아서 그냥 따라다니기만 하면 된다.

이 사람이랑 있으면 따뜻하고 안심이 돼서

같이 있는 게 마냥 좋았던 시기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서로 바쁘게 사느라 그동안 잊고 살았나 보다.


외벌이 회사원 가장의 무거운 책임감.

아무리 애써도 팍팍한 살림살이가 고민인

전업주부 엄마의 종종걸음.


아이들만큼은 아빠의 책임감의 무게에

눌리지 않도록

엄마의 팍팍함이 전달되지 않도록,


애쓴다, 고생했다, 고맙다 충분히 표현할

시간도 없이 하루하루 과업을 해치우며 사는 사람들.

당신은 아빠니까.

나는 엄마니까.


아직 갈길이 멀지만

이만큼 아이들 키우고 자리 잡느라 둘 다 많이 애썼다.


설 연휴가 지났으니 진짜 2025년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서로를 마주 보며 찬란함의 회복을 꿈꿔본다.




삼재를 살아가는 오늘의 생각_3


남편과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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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에 헤어졌습니다.......

(#밤에는 주무십시다.)

(#휴 결혼이란)

(#말해 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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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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