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수영은 닮아 있다. 완성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나의 심장을 뛰게 한다는 면에서도 그렇다. 번역을 하다 보면, 마감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다가 마감일에 나온 버전이 완성본이 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마감할 때 보낸 원고가 완전무결한 완성본이라서 편집부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다가 결국에 마감 시점에 만들어진 번역본을 드리는 개념이므로, 결과적으로는 모든 번역본이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덜 된 번역본을 드린다는 뜻은 아니다.) 마지막에 편집부의 편집을 거치고, 역자 교정을 거친 다음에야 최종본이 되어 독자 여러분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수영도 마찬가지로, “수영 마스터”라는 개념은 있을 수가 없다. 30년간 수영을 하신 우리 친할머니조차도 수영 강습을 들을 때면 항상, 매일 배우고 고칠 것이 있다고 하신다. 나도 2017년에 번역 업계에 뛰어들며 수영을 시작했으니, 코로나 때문에 수영장이 열지 않았던 3년을 제외하고는 5년간 수영을 한 셈인지라, 주변에서는 “그렇게 수영을 했는데도 아직도 배울 것이 있어? 이제는 강습을 듣지 말고 자유 수영만 해도 되지 않겠어?”라고 질문하지만, 수영 강습을 들을 때마다 매번 새롭고 배울 점이 있다.
번역은 나의 커리어적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학생 때, 영어통번역학과를 이중 전공하여 번역 수업을 들었더랬다. 그때 번역 수강생이 20명 남짓이었던 것으로 대충 기억한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우리의 과제를 다 모아, 하나의 영어 문장에 대한 우리의 한국어 번역 문장을 모두 나열하셨다. 그런데 영어 문장은 하나인데, 한국어 번역 문장은 20명이면 20명의 것이 전부 다 다른 것이었다. 그때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었다.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라면 내가 일생을 바쳐서 추구할 만한 직업이겠다. 사람마다 걸음걸이가 전부 다르듯이, 번역본이 전부 다르구나. 그리고 나만의 모양으로 빚어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 번역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번역 업계에 뛰어드니, 노동 강도에 비해 보수가 매우 적은 문학 번역을 하면서 너무나도 행복했다. 문학 번역에 대한 마조히스트적 사랑이라고도 자조적으로 부를 수 있겠다.
언젠가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를 번역할 적에, 매우 소음이 심한 카페에서 책 번역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온 우주에 이 책과 나, 둘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페 안의 사람들도, 커피 원두를 가는 소리도, 내 옆에 놓여 훈김을 내뿜는 커피잔도, 심지어 내가 앉아 있는 책걸상도 모두 사라지고 진공 상태에서 책과 나, 둘이서만 마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한국 독자들을 만나려면 경로가 나밖에는 없다. 나만이 이 책을 책임지고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만 바라보고 있는 어린아이를 맡은 듯이 막중한 책임감이 들면서도, 내가 이 책에 그런 중책을 맡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이 일었다. 그렇게 자아를 잊을 정도로 책 번역에 몰두하다가 정신을 차리면, 3시간이 날아가 있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상하게 왼쪽 발목이 저렸다. 왜 이럴까, 하고 정형외과를 찾았더니, 돌아온 답변은 허리 디스크가 눌려서 신경을 타고 발목까지 통증이 갔다는 것이었다. 책을 책임진답시고 너무 앉아 있었던 게 화근이 된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허리에는 수영이라는 운동이 가장 좋다고 하셨다. 그렇구나, 하고 바로 수영을 등록했다. 번역을 사랑하려면 내 몸을 가꿔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영이 필요하구나.
그렇게 수영을 만나게 되었다. 집 근처, 15분만 걸으면 도착하는 거리에 있는 수영장에서 20대 중후반의 나이에 처음으로 수영을 배웠다. (물론, 초등학교 때 몇 개월간 잠깐 수영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본격적으로는 어른이 된 다음에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수영을 마치고 엄마와 동생과 함께 컵라면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강습 첫날, 수영장으로 가기 위해 지하 1층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날, 몰려오던 습한 염소 향기. 너는 지금 수영장으로 들어가고 있다,라고 영역 표시를 하는 듯한 그 향기. 그 향기에 심장이 뛰었다. 물이다. 놀이다. 재미있는 게 기다리고 있다.
한창 번역에 대한 사랑이 불타오를 때는, 만약 내가 죽을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한다 해도,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번역을 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번역하는 사람이니까,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지금은 아마 그냥 잘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 무슨 번역이야. 사랑이 식은 건 아니지만, 직업보다 나를 우선하게 되었다는 말이 맞겠다.) 그렇게 혼신을 다해 번역하면서는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질 때도 있다: 이 단어는 뭐라고 옮겨야 하지, 주석을 달까 말까, 내가 하는 번역이 진짜 괜찮은 게 맞나, 사실은 모든 문장이 다 오역이면 어쩌지, 나는 계약했고 이 책은 나만 보고 있는데.
그렇게 복잡한 머리를 하고 염소 향기가 나는 물에 들어가면, 사위가 고요해진다. 들리는 것이라면 오로지 나의 숨이 물결과 마찰하며 생겨나는 기포의 보글보글 소리뿐. 그러니까 복잡했던 머릿속이 수영을 하고 나면 정결해지고 정돈된다. 벌게진 얼굴을 하고 찬물을 맞으며 수영하면, 마음이 새로워진다. 지치고 복잡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 한번 해보자, 하는 의지가 생겨난다. 나는 수영으로 여러 번 구원받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내가 심장이 뛰어 일생을 바쳐도 좋을 두 가지 것—번역과 수영—에 관한 사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