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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또 다른 중독

축구에 미치다

by 아마추어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집은 제법 잘 사는 집이었다고 들었다.


정확히 어떤 이유인지는 내가 자라면서도 형, 누나들에게 따로 묻지 않아 지금도 잘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아버지께서 이런저런 일로 재산을 좀 많이 날리신 것 정도만 어렴풋이 알고 있다.


지금은 중학교 때 까지가 의무교육이지만 내가 어릴 땐 초등학교까지만 의무교육이었다.

그래서 중학교 때부턴 매 분기 등록금을 내야 했고 당시 우리 집 형편에선 그 등록금조차 제때 납부하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중, 고등학교 등록금이 그리 큰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부담이 없지는 않은 정도로 당시 집안 형편이 좋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당장 먹을걸 걱정해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건 아니지만 학교 등록금을 제 때 내 본 기억이 몇 번 없을 정도로는 가난했던 것 같다.


등록금을 제 때 내지 못해 학교에서 선생님께 등록금이 밀렸다는 얘기를 들을땐 참 난감했다.

그렇다고 당시 담임선생님들이 나에게 독촉을 하거나 하진 않으셨지만 등록금을 내야 할 때 제때 내지 못하면 학교에서 담임선생님과 눈을 마주치는 게 조금 불편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국민학교 6학년 때쯤이었다.

난생처음 동네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 놀러 가 축구라는 걸 해 보았다.

체격도 부실하고 운동이란 건 전혀 감이 없던 나는 경기를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자 우리 팀에서는 나를 상대팀 골 문 앞에만 서있다가 공이 오면 주워서 넣는 일만 시켰다.


나는 상대팀 골문 앞에 멀뚱멀뚱 가만히 서 있다 가끔 공이 오면 어설픈 발길질로 골문을 향해 공을 차곤 했는데 당연히 헛발질만 해대기 일쑤였고 어쩌다 운이 좋으면 한 번씩 골을 넣곤 했었다.


가끔 축구를 하게 되면 나는 항상 상대팀 골문 앞에 서서 골을 주워 먹는 역할만 했는데

이것도 반복해서 하다 보니 점점 골을 넣는 횟수가 많아졌고 비록 주워 먹은 골이지만 골을 넣을 때의 희열은 나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아무런 재능과 능력도 없던 나는 주변 친구들이 거의 다 떠 먹여주는 골맛에 무척 신이 났고 이런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그때부터 축구에 미쳐 지내기 시작했다.




부실하고 허약했던 나는 축구에 미쳐 지내기 시작하면서 점점 변화하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나는 학교에 가면 짧은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을 불러내 운동장으로 나가 축구를 했고

점심시간은 물론, 방과 후에도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운동장에서 살았다.


주말이나 방학이면 두말할 필요 없이 아침에 눈뜨면 학교 운동장으로 가 친구들과 축구만 온종일 하고 지냈으며 이 시절 나에게 집은 배고프면 밥이나 먹고 씻고 잠만 자는 곳이었다.


무언가에 진심으로 미칠 수 있다는 것 또한 재능일까?

그렇게 허약하고 나약했던 국민학교 시절의 내 모습은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극적으로 달라졌다.


몸은 점점 단단해졌고, 그것도 운동이라고 나를 괴롭히거나 놀리는 친구들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학교생활은 재밌었고 ( 나에게 학교는 친구들과 축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 자신감도 부쩍 늘어 세상에 딱히 두려운 일은 별로 없었다.


단 위에 서술했던 학교에서의 등록금 문제와 가끔 드물게 떠오르는 엄마의 부재가 나에겐 어떤 약점 같은 불편함으로 남아있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불편한 마음은 축구를 할 땐 마음속에서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점점 축구에만 미친놈처럼 빠져 살았고 한창 공부를 해야 할 학창 시절에 공부는 뒷전에 두고 축구만 하며 지냈다.


지리산 등반- 축구화를 신고 등산을 하는 미친놈은 세상에 나밖에 없을듯




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고.

비록 뒤늦게 시작했지만 중학교 3년 내내 정말 축구에 미쳐 지낸 성과가 있었는지 주변에서도 축구선수를 해 보면 잘할 것 같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나름 동네에서 알아주는 실력도 갖추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 드디어 축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었다.


당시 동네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비 정규 축구팀을 만들어 활동을 지원하던 동사무소 직원이 있었는데 그분이 인근 중학교 축구부와 친선 경기를 주선했고.

이 친선경기에 나는 선발로 뽑혀 실제 중학교 축구부 선수들과 시합을 두 번 정도 가진 뒤 상대 축구부 감독으로부터 우리 팀 선수들 중 세명을 지목해 테스트를 해 보고 싶다는 제안이 들어왔던 것이었다.


이때 나도 세명 중 한 명으로 지목되어 테스트를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떨어졌고 한 명만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테스트를 받은 세명중 나와 떨어진 한 명은 중3이었는데.
아무래도 테스트 시기도 2학기 때였으므로 이미 중3인 우리는 스카우트해 봐야 써먹을 일이 없었을 거란걸 이해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중학교 내내 공부랑은 담쌓고 살았기 때문에 고등학교는 내가 가고 싶었던 곳으로 진학하진 못했다.

당시 고등학교 진학은 희망하는 학교에 지원해서 성적순으로 잘라서 합격해야 갈 수 있었다.
난 축구부가 있는 한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그 학교는 내 성적으로는 지원조차 불가능했다.
이후 깨닫게 되었지만 만약 그 학교에 갔더라도 축구부에는 못 들어갔었을 듯하다.
중학교 때 축구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축구부가 없는 나름 지역에서 꼴통학교로 유명한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그렇게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나의 축구선수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고교생활도 여전히 축구에 미쳐 살았다.

이미 공부 따위는 나의 안중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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