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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하는 실수

by 천경득

돈오돈수가 맞은 지, 돈오점수가 맞은 지 나 같은 자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나도 돈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내 깨달음도 문득, 뜬금없이 벼락같이 왔다.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된다. 움직여야 산다. 앞으로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자. 나는 14층 건물 7층에 산다. 한 층마다 20개, 정확하게 140개의 계단이다.


모든 결심이 그랬듯 처음 몇 번 하다, 곧 잊었다. 그러다 문득 술에 취하는 밤이면 옛 결심이 되살아나고, 나의 의지박약을 자책하다가 새로운 용기가 솟는다. 동무들이 함께 있었다면 ‘취했군!’이라 폄훼하면서 말렸겠지만, 다행히 오늘도 혼술이었다.


넘어지면 큰 일이기 때문에 난간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랐다. 얼마만큼 힘들었는지는 핵심이 아니므로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겠다. 술 취해서 객기를 부리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절실히 깨달았고, 한밤에 아무도 없는 계단에서 쓰러지면 자칫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헤이, 아저씨. 쓰러지면 죽어!" 살기 위해서는 걸어야 한다. 온몸으로 한 계단 한 계단을 밀어냈다.


- 이런, 씨바. 14층이다.


내 하루는 왜 이 모양인가.


10년 전이었는지, 아니면 15년 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고양시에서 변호사를 할 때의 일이다. ‘부산’에서 재판이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가기로 하고 인터넷으로 미리 표를 끊어 두었다.


비행기를 안 타 본 사람은 모르겠지만, 당시의 국내선 탑승 절차는 대개 이렇다.


승용차를 공항 주차장에 주차한다. 대략 출발 1시간쯤 전이다. 오전 8시.


항공사 카운터에서 신분증을 주고 티켓을 미리 예매했다고 말한다. 담당자가 컴퓨터를 두드리고, 예약한 티켓을 출력한다. 그 또는 그녀가 티켓에 도착지와 출발 시간, 탑승구 등을 빨강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친다.


출발장 입구에서 보안검색 요원이 신분증과 탑승권을 확인한다.


이후 몸수색도 하고, X-ray 보안검색을 한다. 칼이나 폭탄을 소지하면 비행기를 못 탄다.


탑승구를 찾기 위해서 티켓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음, 8번 탑승구.


8번 탑승구 앞에 가서 기다리면, 곧 이쁜 기계 목소리가 들린다.

**시 **분 **로 가는 대한항공 KE** 탑승을 시작하겠습니다.


**시 **분 **행 대한항공 KE** 이라 적힌 작은 전광판 아래 8번 탑승구에서 탑승이 시작된다.


떨림이나 설렘 없이 스무스하게 탑승했고, 자리도 잘 찾았다, 아주 여유 있게. 내가 비행기를 한두 번 타 보는 것도 아니고.


일찍 일어난 탓에 졸렸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비행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출발 직후 기장이 인사말을 했다. 도착지 날씨가 오늘 괜찮다고 한다.


짧은 비행 후, 곧 도착한다면서 의자를 바로 세우고 벨트를 다시 매라는 방송이 나온다.


거친 착륙이 기장의 아침 기분을 짐작하게 만든다. 잠시 엉덩이가 의자에서 돌멩이처럼 튀어 오른다. 아이, 씨발새끼.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지만, 뱉지는 않는다. 그 정도의 교양은 있다.


씩씩거리면서 서류 가방을 챙겨 인파를 쫓아 도착 게이트를 나왔다. 택시를 타기 위해 붐비는 도착장을 지나 출구를 나섰다.


- 이런, 씨바. 웬 야자수?


사람은 한 번 꽂히면 눈과 귀가 다 닫힌다.

시시비비는 물론이고, ‘부산’과 ‘제주’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다행은 내가 가끔 하는 실수는 다른 사람을 해하지는 않는 종류라는 것이다.


술에 취해서 버스정류장 긴 벤치에 누워 늦게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에게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이 아저씨처럼 된다'는 교훈을 주거나, 지하철을 반대로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식으로 지하철공사의 만성적인 적자 해소를 위해 기여한다.


오히려 세상을 조금 더 낫게 하는 면이 있는 실수이므로 자책하면서 잠을 뒤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끔 하는 실수에 대해 좀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나에게든, 타인에게든.



이렇게 자위하면서 쓴다. 동이 트고 있다. 지금 시각 2025년 5월 31일 새벽 5시 23분. 사전 투표가 끝났다.


PS. 아오, 씨발. 어제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꿈을 꾸었다. 로또를 샀어야 했는데, 까먹었다.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실수를 했다.(뒤늦게 오늘 샀는데, 역시 꽝. 꿈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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