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평화로운 그 세계에 한참 동안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거센 숙취가 다소 가라앉았다. 축 처진 몸을 뜨거운 물에 담그고 싶었다. 아내 허락을 맡고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사 갈 곳엔 욕조가 없다. 간간이 반신욕 하는 재미를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반신욕’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읊조렸다. 따뜻하고 아늑한 기분만 잔잔히 밀려온다. 욕이라는 글자에서 나쁜 의미도 연상될 법한데, 반신욕은 반신욕, 나쁜 욕은 나쁜 욕, 섞이지 않는다. 글자는 같아도 뜻이 서로 멀기에 머릿속 다른 구획에 격리돼있나 보다.
꽤 많은 양의 입욕제를 물에 풀었다. 어차피 오랫동안 쓸 일이 없을 거다. 한 번 정도 더 쓸 양만 남기기로 했다. 하얀 거품이 몽글몽글 올라오기 시작했다. 입욕제는 수전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에 휘말리고 치일수록 맹렬히 거품을 뿜어냈다. 물줄기가 그치면 날 포근하게 감싸주겠지. 거품 이불 덮고 뜨끈한 물속에 잠겨있을 기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 나는 마법처럼 물에 흐물흐물 녹아 사라졌다가 선홍색 피와 보얀 살결로 다시 부활할 것이다.
앉으면 가슴 게까지 올라올 정도로 물이 찼다. 신이 나서 다리 한쪽을 물에 넣었더니, 앗, 뜨뜨! 실패다. 금세 익은 다리가 벌게졌다.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온도가 아닌 것이다. 배수구 마개를 빼고 찬물도 내렸다. 손으로 휘휘 저으며 참을만한 온도로 빠르게 내려가길 바랐다. 무성히 솟아난 입욕제 거품만은 보드라웠다. 딸아이 아기 시절 목욕 시키던 때가 떠올랐다. 거품을 머리에 묻혀 머리카락으로 뿔을 만들었는데, 너무 귀여운 나머지 깔깔대며 사진을 찍었더랬지.
지옥불처럼 화를 내던 욕조물이 다소 평온을 찾았다. 뜨끈한 탕 안으로 입수하니 절로 에구구 소리가 나왔다. 나 아저씨네 아저씨. 혼자 피식 웃었다. 등을 기대니 귀에까지 거품이 올라왔다. 작디작은 거품 알갱이가 터지며 나는 미세한 폭폭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이게 바로 반신욕 ASMR. 작은 방울 하나가 내는 소리는 들을 수 없겠지만, 수많은, 억 단위가 넘을지도, 방울이 여기저기서 터지면 내 고막까지 울릴 수 있는 것이다. 방울들이 소멸하며 내는 비명이라는 생각도 들어 마음이 살짝 아팠다.
거품에서 향기가 났다. 무슨 향인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했던가. 정신을 집중하여 냄새를 묘사할 단어들을 골랐다. 전혀 고급스럽지 않은 싸구려 냄새에 가까웠는데. 퐁퐁, 그래 퐁퐁이다. 노란 용기에 담겨 있던 주방 세제. 어렸을 적 맡아본 그 화학적 향기 85%, 나머지 15% 정도는 코튼 향수 냄새라고 하자. 만족스러운 향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을 찾아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어쩌면 내 집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반신욕을, 감각을 총동원하여 즐기고 있다가 한 가지 빠뜨린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 미각이다. 나는 아직 반신욕의 맛을 보지 못한 것이다. 물은 마시기 싫고, 분명 몸에 안 좋을 테니, 거품에 혀를 대는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용기를 내어 거품에 살짝 혀끝을 대었다. 거북한 맛, 비릿하다고 해야 하나. 비누 맛이 혀를 때리고 빠르게 날아갔지만 맞은 자국에 가볍게 찝찝함이 남아 침을 뱉고 물로 입을 헹구었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뜨거워진 피가 세차게 몸 구석구석을 순환하며 덥히니 모공에서 땀이 송송 흘러나왔다. 배수구 마개를 열고 물이 빠지는 동안 손으로 코를 막고 물속에 드러누웠다. 호흡을 멈추고 귀안을 물로 꽉 채우니 한 차원 아래로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곳은 2차원 면의 세계. 어디선가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내 심장이 뛰는 소리인지 물이 빠지는 소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숨을 계속 참을 수 있었다면 단순하고 평화로운 그 세계에 한참 동안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사진 : pixabay